2013년 4월 29일 월요일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마6:25)

1. 이 명령은 생의 존립과 직결된 먹고 마시고 주거하는 생필품과 결부되어 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무관한 생의 악세사리 조항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땅에서의 생이 짧으신 젊은 주님께서 무심코 내뱉으신 현실과 동떨어진 과장법일 뿐이라고 보기에는 사유의 규모가 방대하고 논리가 치밀하다. 창조와 섭리,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와 가치비교, 번영의 아이콘인 솔로몬을 능가하는 들풀의 영광, 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 이 모든 거대한 담론들이 '염려'라는 우리의 성향을 둘러싸고 절묘한 질서를 따라 쏟아진다.

2. 우리 주님은 염려하는 것(μεριμνάω) 자체를 문제삼지 않으셨다. 주님의 금령은 염려의 대상과 관계한다. 염려는 인간의 본성이다. 제거하지 못한다. 우리가 조절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염려의 대상이다. '염려'나 '근심'이란 단어를 부정적인 뜻으로만 보아서는 아니된다. 바울은 이런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가 없는 회개를 이루고 세상의 근심은 사망에 이른다는 진술로 대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신자를 논하면서 그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주님의 기쁘심에 몰입하게 된다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염려도 언급했다.

3. 문제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염려의 대상인 세상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는 거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먹고 사는 일이 죽는 것보다도 각박하고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다양한 종류의 골리앗과 늑대들이 거대한 창과 날카로운 이빨로 생존을 위협하고 있어서다. 염려의 끈을 조금만 늦추어도 살벌한 적자생존 무대에서 도태될지 모른다. 이처럼 목숨을 위해 음식과 주거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엄중한 상황인데 염려하지 말라는 건 논리적 아구가 도무지 안맞는다. 주님의 존재를 생략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명령에 명령자가 고려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4.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염려의 대상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과 동일하게 중요한 것은 그 명령의 주체가 주님이란 사실이다. 주님은 엄숙한 명령만 내리시고 관심의 손을 떼시는 분이 아니시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주님의 의지와 계획과 섭리와 맞물린 명령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위협적인 존재이나 주님께는 그렇지가 않다. 세상과 세상의 모든 권세들을 주관하고 계신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세상보다 크고 높으신 주님께서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의지의 다른 표명이다. '염려하지 말라'는 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상황이다. 즉 '주님 안에 거하라'는 명령이다.

5. 세상보다 크신 주님을 떠나면 세상보다 작은 우리는 세상을 염려할 수밖에 없다. 세상 근심으로 일평생을 소진하고 만다. 그러나 비록 세상의 근심이 아무리 압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아직까지 비유에 불과하다. 우리의 가장 심각하고 궁극적인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 자체이다. 세상은 고작해야 코의 물리적인 호흡을 인질로 삼아 일시적인 심술을 부리지만 하나님은 영혼을 능히 영원토록 멸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증언처럼, 하나님을 버림이 우리가 염려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고통이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염려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하신 이유겠다.

6. 목숨을 위하여는 염려하지 마시라.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는 염려의 바다에 잠기시라.

이는 오늘 들었던 주일설교 주제의 내 방식의 요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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