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4일 수요일

김성수 교수님을 만나다

수년전에 김성수 교수님을 처음으로 찾아뵌 건 신학과 목회의 균형점에 대한 고민의 정점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우만교회 철문에는 아무런 장식과 안내문이 없었다. 내부로 들어가도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은 벽들만이 사방에서 무표정한 백색 눈빛으로 낯선 이방인의 출입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데 권사님들 몇 분의 인자한 음파가 고막에 착지하는 순간, 건물은 건물이요 교회는 성도라는 사실이 온 의식을 관통했다. 따뜻했다. 긴장과 어색도 서둘러 무장을 해제했다. 잠시 후 교수님이 오셨고 나는 예배에 참석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끝마치고 교수님과 면담에 들어갔다.

K: 먼 곳에서 이렇게 누추한 곳에 오셨어요?

H: 오늘 예배에서 경험한 그런 은혜가 있는 곳인데, 결코 누추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자를 맞이해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K: 공부하기 힘들지요?

H: 힘들지만 한국에 계신 분들의 섬김과 수고에 비하면 마치 안식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교수님을 찾아뵌 것은 두 가지의 문제를 여쭙고 싶어서 왔습니다.

K: 내가 해답을 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허허허,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H: 첫째는 교수님의 유학에 대한 것입니다. 칼빈과 웨민에서 공부를 하시다가 접으시고 한국으로 돌아오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K: 아, 그거요~~ 허허허, 아주 옛날 일인데...칼빈과 웨민에서 공부를 했었지요. 그런데 거기서는 성경을 다르게 읽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갈등이 생겼지요. 성경을 인문학적 방법으로 저렇게 쪼개고 분석하는 게 전부도 아니고 잘못하면 말씀이 훼손될 수도 있는데...성경을 성경대로 읽고 전체를 조망해야 하는데 그런 안목이 보이지를 않아 아쉬움이 컸었지요.

H: 칼빈이나 웨민이 자유주의 입장도 아니고 비평학에 과도히 골몰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느끼신 거예요?

K: 물론 거기에 계신 분들이 자유주의 입장까지 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배우고 이해한 성경 독법과는 꽤나 달랐어요. 신약과 구약의 저자가 한 분이시고 하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비록 원문에 충실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그런 유기적인 신구약의 해석학적 소통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본질적인 게 취약해 보이니까 그 두 곳에서 학업을 지속할 수가 없었지요.

H: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오신 거로군요.

K: 한국으로 돌아와 김홍전 목사님을 찾아 갔었지요. 이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건데...

H: 궁금해요, 교수님...김홍전 목사님과 상담을 하셨군요?

K: 그런 셈이지요. 그 어르신께 이런저런 이유로 유학을 접고 왔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리고는 독일로 가는 게 좋을까요? 하고 물었어요. 그런데 김홍전 목사님은 약간 시간을 두시더니 고개를 저으시며 아니라고 하셨지요. 그러면서 성경을 원문으로 계속 읽으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게 좋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H: 그런 사연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그럼 교수님이 수업에서 히브리어 성경만 사용하는 것도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정신이 반영된 일종의 해석학적 암시라고 보아도 괜찮나요?

K: 허허허,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닌데 그런 셈이군요.

H: 그런데 교수님은 영미권을 비롯하여 유럽 대륙의 신학에도 조애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K: 많이 읽었지요. 현대의 신학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아는 정도지요. 성경을 바르게 읽는데는 그리 도움을 얻지 못했어요.

H: 저는 유학생활 중인데요.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어떤 자세로 공부해야 할지 제 나름의 가닥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때 한마디 한마디 하시는 말씀에 교수님의 권위가 묵직하게 실려서 말씀이 간단한 듯하여도 학업에 굵직한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귀한 답변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두번째 질문을 여쭈어도 될까요?

K: 도움이 되는가요? 다 지나간 개인적인 얘기인데 멀리서 온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쁘네요. 두번째는 뭔가요?

H: 신학을 공부하는 내내 교회와 신학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신학과 교회의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의 구체적인 실현에 대해서는 그림이 그려지질 않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그런 저의 고민과 궁금증에 어떤 입체적인 답변과 같으셔서 만나뵈면 꼭 여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학교의 강의와 교회의 현장목회 사이에 아름다운 균형점을 찾으시고 선보이신 모델로서 후학들이 많은 도전과 도움을 얻고 있는데요. 교수님은 교수님의 신학과 목회의 균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요? 제가 보기에는 그런 균형의 정점에 서 계신 듯한데요. 교수님은 이런 균현에 만족하고 계신지요?

K: 아하...두번째 질문이 그런 균형에 대한 거로군요. 사실 지금도 찾아가고 있는 중이지요. 많이 헤매고 있습니다. 배율을 여러모로 조정해 보기는 했지만 지금의 상태가 최선의 균형이라 여긴 결과지요. 주님께서 이걸로 기뻐하고 계실까요? 사실 학교에도 충실하지 못하고 교회에도 충실하지 못하니까 아쉬움이 많습니다. 결국 균형의 정점에 서 있지도 않고 만족하고 있는 것도 아닌 셈이네요. 이게 쉽지가 않은 문제예요. 평생 걸릴 과제일 듯하네요. 그래서 지금도 찾아가고 있답니다. 지금 공부하고 계시니까 한번 시도해 보세요.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네요.

H: 하하하...교수님, 저는 그냥 교수님의 균형이 제일 좋습니다. 교수님의 균형을 구현하는 게 저에게는 아득해 보이는 과젠걸요. 오늘 말씀해 주신 한마디 한마디를 고이 간직해서 부끄럽지 않은 후학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께요. 오늘 이렇게 무작정 찾아온 초면의 학도에게 환대와 귀한 교훈을 후하게 배풀어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이게 혹시 필요하지 모르겠다' 하시면서 십여권의 책을 선물로 주시었다. 권별로 저자 싸인까지 챙길 분위기는 아니었다. (지금도 후회가 되지마는 ㅡ.ㅡ) 마음샘 출판사가 간행한 목사님의 성경별 강설 모음집을 싸들고 미국으로 왔다. 국어가 척박한 땅에서는 월척을 낚아올린 희락에 버금가는 우리말 책이었다. 책장을 펼치면 그때의 온화한 교수님 목소리가 활자에서 튀어나올 듯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교수님의 꾸며지지 않은 중심과 대면할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다. 주고받은 언어의 교환보다 한 스승과의 인격적 교류가 주는 유익이 이런 것이구나 라는 교훈의 여운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나처럼 학생의 신분으로 있는 신학생은 모두 각 스승들의 고유한 무장을 전수받기 위해 치열하게 각개전투 들어가면 좋겠다. 사제간의 관계는 정보의 유통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성령께서 각 스승에게 위탁하신 아름답고 고유한 그것을 공유하는 관계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게 중요하고 그 스승의 고유한 비책을 배우는 게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분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늘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한번의 짧은 만남이 그동안의 간접적인 만남을 직접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주변에 이처럼 귀한 스승들이 계셔서 행복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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