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5일 월요일

애통의 복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팔복을 생각하면 낭패감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하나같이 지상에서 실현 불가능할 것 같아서다. 게다가 팔복의 면면을 하나하나 훓어봐도 복과는 무관해 보여서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아마도 천국의 모습을 맛배기로 혹은 훈육 차원에서 귀띔해 주신 것이라며 슬쩍 넘기려고 해도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하였다는 언급에서 곧장 무너진다. 이런저런 사유의 좌충우돌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팔복은 그리스도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한 복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기 위함이다.

팔복에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는 이사야의 진술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심령의 가난, 애통, 온유, 의에의 갈증, 긍휼, 마음의 청결, 화평, 핍박은 지갑을 두툼하게 하고 권력의 수직상승 같은 성공의 비법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복을 기대하던 사람들이 실망의 등짝을 급하게 돌이킬 사안인데 그게 복이란다. 복을 주님과 무관한 나의 유익으로 여긴다면 아무런 쓰잘데기 없는 것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복이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밀착과 연합이 복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애통하는 자는 복되다. 애통은 예수님의 마음을 일컫는다. 특이한 것은 애통의 대상이라 할 목적어가 명시되어 있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으려고 오셨기에, 애통의 대상은 모든 시대와 온 땅에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일 것이라는 추측 말이다. 나아가 우리에겐 하나님의 백성 판별하는 절대적 기준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우리가 애통해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이라 보아야 할 듯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분, 알고도 합당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는 분, 가난하고 연약하고 무지하고 불안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분 모두가 애통의 대상이다. 자신과 타인이 모두 가능하다.

애통하는 자가 복된 이유는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어떤 위로인가? 나 개인의 사태가 잘 풀려서가 아니다. 이사야 40장의 진단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죄사함 때문이다. 이는 마치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시는 것처럼 예수님 같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서 밀려오는 위로이다. 죄사함의 위로는 우리가 예수님의 위로하는 마음을 가지고 죄로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애통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즉 개인적인 환희에 머물지 않고 나와 똑같이 죄의 끈적한 늪에서의 허우적 행보로 생을 탕진하는 다른 분들의 불쌍함이 치유되는 위로까지 포함한다.

이렇게 애통하는 교회가 있다면 세상을 진동시킬 어떠한 혁명이 일어날지 궁금하다. 지금 대체로 잠잠한 것은, 애통의 복을 교회가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겠다. 주님의 귀에는 쟁쟁하게 들리는 썩어짐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의 처절한 신음을 듣는 귀가 우리에게 없는지도 모르겠다. 교회마다 생존이 급급하고 부패 가리기가 분주한데 다른 피조물의 사정까지 챙길 여력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는,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 규정한 복에 헐떡이고 있어서인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교회가 애통하고 있다면, 이는 그 교회가 이미 복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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