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7일 일요일

온유와 두려움을 가지고

온유와 두려움을 가지고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하여 그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 (벧전3:15)

강영안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다원주의 시대에 타종교 혹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이 쵝오라고. 온유와 두려움은 복음 증거자가 높이 비상할 수 있는 태도의 필수적인 양날개다. 돼지에게 진주가 어울리지 않듯이 더럽고 추한 그릇은 보다 고급하고 중요한 것을 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으로 '은혜롭고 감동적인 말씀'을 도덕성이 세상의 평균치에 이르지도 못하는 설교자의 입에서 출고되는 기현상을 목격한다. 당나귀의 입도 빌리시고 상황에 따라서는 돌들을 통해서도 찬양의 음률을 생산해 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해명을 시도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의 뒤틀린 기호와 귀에 달콤한 설교가 손잡은 남루한 흥정의 결과라고.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의 백성들을 통하여 모독을 당한다는 사실을 때때로 언급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능력과 지혜와 자비가 그의 백성들과 무관하지 않아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라고 하시었다. 이는 지금도 오늘을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 즉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든지 멸시와 조롱을 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핵심은 그의 백성된 우리로 말미암아 모독을 당하시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언약은 분명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증거지만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죄를 본성으로 가진 추하고 부패한 인간과 자신을 끊어질 수 없는 '운명'의 끈으로 묶으신 일이었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산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이유 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때문에 거룩하고 온전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여정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저자시고 친히 증거하는 분이시다. 성경의 객관적인 진리와 더불어 예레미야 및 에스겔 선지자의 기록처럼 우리의 마음과 영에 새기신 동일한 주관적인 진리가 있다. 하여 진리를 맡은 자들에겐 성경의 객관성에 이를 것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그리스도 닮기가 요구된다. 이는 베드로가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에 관하여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의 방식을 따르라고 한 맥락이다.

소망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리스도 예수를 준비하는 것은 강제와 강요의 주먹이 아니라 주님의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과 경박함이 아니라 사안의 위중함에 적합한 경외의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사회가 기독교를 조롱하는 것은 그 진리가 아니라 증거자의 됨됨이와 행실이다. 예수님이 미워서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영광이다. 면류관과 같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못나서 주님이 욕을 당하시는 상황이다. 예수님은 좋은데 그를 따르는 자들은 싫다는 형국이다. 너희의 주님과 너희는 왜 그렇게 다르냐는 조롱과 비난이다. 이를 두고 골리앗의 할례받지 않은 방자함을 운운하며 다윗의 짱돌을 던져야 한다고 격정을 토하는 것은 수치의 기본기도 모르는 처신이다. 문제의 근원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야 하고 십자가 위에서 사선을 넘듯이 두렵고 떨림으로 복음 증거자가 되는 게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진리의 엄밀성을 추구하는 자일수록 고차원의 온유와 경외가 요구된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학을 공부하고 알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그릇이 되어 쓰임을 받으시라. 과격하고 거칠고 무례하고 교만하고 경박한 찌끼와 흠결부터 제하시라.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었다. 예수님과 같이 되지 않으면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전하지도 못한다.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으로 무장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침묵이 하나님의 나라 확정에 협조하는 일이겠다. 하여 두렵고 떨린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진리를 혼탁하게 하는 흙탕물의 주범이 될까봐서 그렇다. 신학의 물 좀 마셨다고 목이 곧고 어깨가 뻣뻣해 진다면 정상이 아니다. 진리가 깊을수록, 그 맛을 알수록 더 온유하고 더 겸손하고 더 떨려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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