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1일 목요일

이타적인 윤택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잠11:25)

성경에는 평서문도 명령문을 방불한다. 사실의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의 우회적인 표현으로 봄이 합당하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가 윤택하여 진다는 건 세상 굴러가는 이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섭리를 완곡하게 표명하신 거다. 본문은 타인을 구제하는 성품의 소유자는 풍요롭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관용이 풍요를 낳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기계적인 인과가 아니라는 얘기다.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을 구제하면 스스로 괜찮다는 자평에 들어간다. 그로 인해 명성도 높아지고 재산도 불어나면 자신이 쌓은 공덕의 정당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단호하게 말하건대, '그거 아니거든~~~'

동일한 현상의 반복적인 관찰에서 우리는 수학적인 공식이나 기계적인 질서를 건져낸다. 사회과학 분야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리 정밀한 현미경 수준의 관찰로도 만물과 역사의 질서가 사물과 사건 자체 안에서는 그 궁극적인 원인이 발견되지 않도록 가리워져 있어서 늘 엉뚱한 대상에게 공로를 돌리는 게 인간의 지적 본성적 한계이다. 그래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일에 경이로울 정도의 민첩합을 보인다. 희생하고 기부하고 행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섬기는 분에게 존경과 칭찬이 이어지는 것은 그분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질서를 조성하고 붙잡으신 결과이다.

자신의 윤택이 타인의 윤택에서 비롯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사회적인 질서이다.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이다. 개인적인 삶의 방식도 동일하다. 즉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타인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라는 일급 계명과도 맥락이 상통한다. 그러나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질서도 모르고 이와는 정반대로 질주하는 세상은 늘 자기를 향하여 명예와 재물과 용모와 지식을 추구하고 축적하고 활용한다. 때때로 타인을 향하는 모양새도 취하는데 그건 노골적인 자기애를 적당히 가리는 방편이요 나아가 자기애의 극대화를 노리는 투자 차원이다. 타인의 윤택 자체를 우선적인 가치로 여기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타인을 칭찬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을 배부르고 풍요롭고 윤택하게 하는 윤리의 방향성이 정착된 가정이나 사회가 진정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다. 또한 주님께서 원하시는 개별적인 생의 모습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생소하다. 타인의 윤택에서 복통이 유발되는 문화가 보다 친숙해서 그렇다. 근본적인 고민과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교회가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기보다 자체의 승승장구 기조로 나간다면 박윤선 목사님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섭리적 질서에 역류하는 불경한 '꼬라지'가 연출되고 말 것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은 고사하고 시커먼 소금뿌림 당하기가 일수겠다. 가까운 곳에서 타인을 윤택하게 하는 연습을 시작하고 땅끝까지 이르면 좋겠다.

정녕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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