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4일 수요일

무례 퇴치법

상대방이 연고 없이 무례하게 대한다고 흥분하지 마시라
무례의 당사자가 스스로의 잘못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다.
그에게서 즉각적인 사과의 목소리가 출고되지 않는 것은 
대체로 성대의 기능이 체면이나 민망함에 압도되어 있어서다.

일단 무례가 벌어지면 가해자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분위기의 주도권은 의외로 피해자가 거머쥔다.
이때 깔끔한 한판승을 원한다면, 고도의 예를 갖추시라.
가해자를 향한 일말의 사랑과 존경도 회수하지 마시라.

피해자의 반응에 가해자의 신경이 극도로 고조되어 있는 상황,
인간의 진정성이 가장 강력하게 먹혀 드는 절호의 시점이다.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피해자가 겸손의 허리를 숙이고 
존경의 눈빛에 흔들림이 없다면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무례가 없다.

무례와 예의 극명한 교차 속에서 깊은 존경과 신뢰가 빚어진다.
한 사람의 일대기 속에서 그런 기회, 흔하지가 않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의 평형적 정의 구현일랑 접으시라.
1마일 부탁에 10마일을 들어주고 겉옷 요청에 속옷까지 더하시라.

무례 한 토막에 운명을 내맡기는 생의 경박은 결코 연출하지 마시라.
아무리 끈질겨도 세월의 일방성에 떠밀리지 않는 인연은 없어서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듯이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에는 잊혀진다.
일시적인 무례의 멱살을 잡으려고 영원한 것을 놓쳐서는 아니된다.

'죽은 개'를 방불하는 폐족 시무이의 하찮은 무례 속에서도 
하나님께 반응하는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 주님이 짙게 투영된다.
그 상황이 주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갈 호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백성들은 그런 왕이 발산하는 영광의 섬광에 휘감기지 않았을까...

당장 무례자가 변하지 않아도 괜찮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건 아니니까.
기독인의 정체성 사수의 일환이며 하나님의 승인이 떠어지면 되니까다.
모든 자랑은 땅에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온다는 사실도 이에 부합한다.
변화가 없더라도 무례가 더할수록 예가 깊어지는 대처법은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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