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1일 목요일

말씀과 전통의 긴장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하느니라 (막7:8)

역사신학 전공자로 교회사에 등장했던 신학전통 중에서 성경에 가장 충실하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높이와 넓이와 길이와 깊이를 가장 풍요롭게 구현하고 담아낸 최고의 신학적 체계와 내용을 물색하기 위해 나는 지금까지 다양한 먹물을 먹으며 이제 조금 몸풀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본격적인 여정을 떠나도 될 티켓을 겨우 장만한 뿌듯함과 유사하다. 그러나 지금도 고민의 아랫목을 차지하며 늘 두려움과 떨림을 무시로 일으키는 주제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전통 사이에서 감지되는 미묘한 긴장이 바로 그것이다.

폴라누스 아제의 교부학을 공부하며 한 수 배웠다고 생각되는 건, 아무리 기라성 같은 믿음의 거인이라 할지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와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제롬, 바질, 그레고리, 크리소스톰, 암브로스, 시릴 등 동서를 종횡무진 오가며 탐독하고 연구하며 교부학의 수맥을 짚어내되 동일한 교부의 동일한 저작 내에서도 늘 성경적 진리의 절대적 기준이란 촘촘한 그물망에 투과되는 것들만 취하려는 신중한 취사선택 자세를 독하게 고수했다.

교부의 명성이 뛰어나고 신학적 선이 굵고 교리적 질량이 묵직한 문헌이라 할지라도 내용이 진리의 성경적 정통성과 범교회적 보편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차가운 냉대를 불사했고 필요에 따라서는 비판의 날 세우기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교회사적 악명이 자자했고 잡다한 사상의 짜집기식 혼합으로 신학적 정체성도 모호했던 인물이나 문헌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진리의 섬광이 한 줄기만 발하여도 동료들의 오해를 의식하지 않고 당당히 그 대목을 인용했다. 나의 눈에는 폴라누스 교부학이 전통의 무분별한 배끼기를 계시 의존적인 사색으로 극복한 사례였다.

개혁주의 신학을 좋아해서 개혁주의 신학의 원숙한 골격 세우기에 탁월했고 고대와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가용한 문헌들을 낱낱이 수색하여 진리의 정통성과 보편성이 도톰하게 오른 교리적 살쩜까지 꼼꼼하게 채운 폴라누스 아제의 신학을 택하였다. 그러나 폴라누스 신학의 판박이 복제는 금물이다. 사람은 추종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의 전통이 자칫 하나님의 말씀을 폐할 수도 있어서다. 그렇다고 기존의 개혁주의 전통과의 차별이 무슨 신학의 혁신적인 대로인 양, 새부대의 새술인 양, 전통의 갈비뼈에 거만한 옆차기를 가하는 것도 동일하게 위험하다. 신학적 긴장감은 여기에서 돈다.

교회는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최소한 다른 '누가 가라사대' 권위로 안심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라는 말이다. 아무리 인품이 뛰어나고 명성이 자자하고 광범위한 공감대를 확보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권위에 의존하는 진리의 확립은 용납되지 않는다. 교부들도, 종교개혁 인물들도,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도 이런 태도를 견지했다. 자신을 따르지 말라고 정색을 하며 거절의 격한 손사래를 친 어거스틴 할배가 대표적인 경우다. 하물며 어거스틴 신학의 신들메도 풀지 못하는 분들이 '나를 따르라'며 부끄러운 줄 모르고 협박에 가까운 독촉의 막대기를 휘두르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겠다.

우리는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지 말아야 한다. 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지 않으면 괜찮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폐할 여지나 빌미도 제공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까지 추구해야 한다. 늘 올바른 길을 가는데도 은큼하게 틈타는 죄의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의 배척이 아니라 좋은 선배들과 좋은 문헌들을 부지런히 탐독하고 소화하되 사람자랑 전통자랑 같은 탐구의 중턱에 주저앉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의 진리가 보일 때까지 완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신앙의 거인 거명하는 것이 즐거운 그 지점의 유혹을 지나가야 한다. 심히 어렵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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