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7일 수요일

믿음의 출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칼빈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ἐξουσία)'의 의미가 마치 주님을 영접하고 거절할 능력(facultatem) 혹은 선택의 자유(liberum arbitrium)인 것처럼 생뚱맞은 해석을 도출하는 교황주의 학자들을 일컬어 물에서 불(ignem ex aqua)까지도 끄집어낼 자들이라 비꼬았다. 실제로 온 세상을 지으셨고 온 세상에 계시었던 로고스가 자기 땅에 오셨지만 세상이 그를 알지도 못하였고 영접도 아니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과 영접은 인간의 실력이 아니라는 증거겠다. 같은 맥락에서 믿음과 영접의 가까운 주체가 사람이긴 하지만 혈통이든 육정이든 사람의 뜻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근원적인 뜻에서 비롯된 은혜임을 곧장 밝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우리가 받은 것은 뒤이어 기록된 말씀처럼 은혜와 진리로 이루어진 독생자의 충만한 영광을 따라 받은 것이기에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함이 합당하다. 여기서 두 가지의 결론이 뒤따른다. 첫째, 주님을 믿고 영접한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타인에게 영접의 계기와 수단을 제공한 분들이 어떤 공로나 댓가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기적이다. 땅에서의 시공간적 인과로는 설명되지 않는 단절적인 변화이기 때문이다. 요한의 기록처럼 세상이 주님을 알지도 영접지도 않았기에 믿음이 기대될 수 없는 상황에서 알고 영접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다.

혈통이 믿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아무리 설득하고 강요한다 할지라도 믿음을 생산하진 못한다. 믿는 가정의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의 자동적인 상속자가 되지는 않는다. 믿음의 가정에서 불신자 자녀가 나오기도 하고 목회자의 자녀들 중에서도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허다하다. 이상할 거 없다. 이미 믿음의 조상 집안에서 보란듯이 벌어졌던 일이었다. 즉 에서가 언약의 징표로서 할례를 받았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미워하신 바 되었다. 이는 믿음이 하나님의 뜻으로만 주어지는 천상적인 선물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믿음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혈통을 따라 당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마땅한 은혜이다.

한 가정에 양과 이리가 공존할 가능성과 한 교회에도 양과 이리가 공존할 가능성과 한 신학교 안에서도 양과 이리가 공존할 가능성을 누구도 거부하지 못한다. 알곡과 가라지의 공존, 어쩌면 은혜를 더욱 은혜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장치일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러한 까닭에 너무 지나친 심판자의 행보는 위험하다. 본인이 머리 둘 곳도 없어질 것이지만, 타인들도 주변에 남아날 자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방비 상태의 신학적 무장해제 입장을 두둔할 수는 없다. 주님은 가라지의 개입도 허용을 하셨지만, 확고한 진리의 울타리를 성경의 기록으로 우리에게 제공하신 분도 주님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경의 확고한 진리를 가장 잘 담아낸 시대와 인물과 체계과 적용을 넓은 교회사 속에서 탐색하고 발굴하는 작업은 그래서 필요하다. 결국 깔대기가 역사신학 전공으로 기울었다. 이런~~~ 이건 직업병의 중증인가? 가능성, 농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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