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2일 금요일

불편의 유익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나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잠14:4)

소시쩍에 시골에서 소를 키웠었다. 소의 질퍽한 배설물 중앙에 비자발적 족적을 찍은 경험이 한두번에 아니었다. 그런 날은 하루종일 꿀꿀한 기분이 떠나지를 아니했다. 그런데 소는 자신의 배설물을 배로 뭉개고 뒹구는 게 일상이다. 축축한 배설물에 잡다한 동류들이 달라 붙고 적당한 굳기가 오르면 부드러운 갈퀴로 털을 빗으며 '갑옷' 벗겨주는 건 나의 일상이었다. 그런 일상에서 구유의 악취는 약과였다. 그때에는 소가 없었으면 인생이 그렇게 고달프지 않을 것 같았었다. 그러나 당시 소가 집안의 미래라는 건 시골의 상식으로 통하였다.

우리는 나에게 유익하고 편하고 즐거우면 하나님의 뜻이고 손해와 불편과 불쾌를 수반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그분의 자의로 결정되지 못하고 우리의 편이와 기호로 인해 강요된다. 기도는 우리의 전적인 포기이고, 전적인 의존이며, 전적인 항복인데, 실상은 그것들이 주님께 강요되고 있어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것이 나의 뜻이 되도록 씨름하는 자기부인 행위인데,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삼도록 하나님께 관철하는 작업처럼 여겨지고 있다. 때때로 알아 들으실 때까지 절식과 절면도 불사한다.

젊어서의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랬다. 그러나 고생의 진가는 급속하게 확인되는 게 아니어서 청년들은 요리조리 피하는 처세술에 귀가 민감하다. 그런 정보의 유통은 얼마나 급속한지 모른다. 물론 나도 고생 한가닥은 했다고 내밀 명함은 없다. 그러나 고생은 주어질 때 붙들어야 한다는 교훈 정도는 체득했다. 그래서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야고보의 역설이나, 고난을 시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했던 시인의 고백도 낯설지가 않다. 고난으로 얻는 소득이 너무나도 커 고난이 선물처럼 보였었다.

세상의 모든 명서와 명품과 명화와 명곡과 명인의 공통점은 고통의 결과라는 거다. 인생의 표피만 건드리는 것에서는 걸작을 기대하지 못한다. 삶의 심연에 큰 울림을 주는 것들은 대체로 고통의 도가니 속에서 정제되고 숙성된 것들이다. 주님은 인간의 타락한 실상을 영원한 차원까지 벗기시되 성부께서 성자를 버리시는 무한한 심각성을 죽음의 십자가로 보이셨다. 동시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시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기쁨과 희락의 극한도 보이셨다. 이를 위하여 불편하고 억울하고 비참하고 고통스런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부패한 세상에 진리를 심고 가치를 구현하는 일에는 수고와 고통이 수반된다. 쉬웠다면 주님께서 그토록 부당하고 처참한 대우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죄많은 나에게 진리가 새겨지고 생의 의미를 담아내는 과정도 이를 방불한다. 소의 지저분과 악취가 우리의 이맛살을 구길 수는 있겠으나 그넘의 소 잃고 외양간 수리하는 뒷북의 허탈함에 비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불편과 불쾌와 손해와 억울과 곤란을 만나거든 신앙의 뼈가 여무는 호기로 여기시고 쌍수로 맞으시라. 할수만 있다면 이 고난의 잔을 옮겨 달라는 절규가 저절로 나올 만큼 막상 부딪치면 실천이 어려울 것이지만, 그래도 원칙은 끝까지 고수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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