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6일 수요일

개미의 교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6:6)

만물의 영장이 하찮은 미물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전제된 구절이라 불쾌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라고 하신 말씀이다. 인간이 곤충보다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게으름은 아주 평범한 사례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사례만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다. 지혜와 여호와 경외는 분리될 수 없고 경외가 깊은 사랑의 결과라고 한다면, 다른 모든 문제가 다 그렇듯이 여호와 경외의 부재, 나아가 사랑의 빈곤이 결국 게으름의 원흉이라 하겠다. 개미는 이러한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지혜자가 지목한 최고의 스승이다. 물론 우리의 영광과 감사는 그 개미를 지으시고 그것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신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겠다.

지혜자가 관찰한 개미의 지혜로운 행실은 딱 하나다. 즉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는데 여름 동안에 양식을 예비하며 추수 때에 곡식을 모은다는 거다. 행위의 주체가 단수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본문의 초점이 공동체 의식이나 협동정신 같은 집단적인 교훈이 아니라 개개인의 자율성이 여기서는 지혜의 핵심임을 확인한다. 외부의 권위와 지시와 강압이 개미의 행실을 유발하지 않았다는 그런 자율성 말이다. 물론 개미의 자율성은 본능적인 것이다. 개미의 행실이 겨울의 혹독한 환경을 예측하고 여름과 추수기가 양식을 비축할 적기라는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합리적 행위라는 의미의 자율성은 아니라는 얘기다.

사태를 분별하고 행실을 조절하는 보다 고급한 상황판단 기재를 가진 인간이 지혜를 상실하면 개미의 본능 의존적인 행실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관이 보란듯이 펼쳐지는 거다. 사실 어느 사회를 보더라도 인간은 지도자와 감시자와 권위자가 생략된 환경에서 사람답게 생각하고 처신하는 경우가 대단히 희귀하다. 자율성은 없고 충만한 타율의 반응자로 살아간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독재가 사라지면 자유로운 삶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감지된다. 진정한 자율성은 사실 외부의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다. 감옥에서 죄인과 노예라는 신분의 외투를 걸친 오네시모 면전에서 그를 형제라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바울의 행실이 대표적인 자율성의 발휘라고 하겠다.

자율성은 사회적인 인간문맥 안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다. 신앙의 본질도 그것과 결부되어 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지도자요 감시자요 주권자다. 그러나 그분은 보이지 않으신다. 그렇게 안계시는 분처럼 스스로를 감추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건 여호와를 본 자는 살지 못하기에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의 은둔이다. 동시에 여호와를 본 것에 근거하여 행위가 촉발되는 그런 타율성을 방지하는 배려시다. 하나님은 두령과 간역자와 주권자의 부재 속에서도 스스로 올바르게 처신하는 개미처럼 우리에게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시기 때문에 스스로를 숨기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생산하기 위해 위협과 강압의 짱똘을 던지지 않으신다. 감독자의 억압적인 눈빛을 흘기지도 않으신다. 자원하는 심령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강제적인 법령의 형식으로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새기셨고 준행할 부드러운 마음도 지으셨던 거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극도의 자율성이 발휘되는 사랑의 결과로서 진정한 순종이 비로소 가능함을 잘 보여준다. 보상의 잿밥에 눈이 어두워 투자 차원에서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의 형벌이 너무도 과중하여 두려움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의 일환으로 순종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이 아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의 도의적인 보답 차원에서 마지못해 드리는 인색한 순종의 제사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순종과는 무관하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자원하는 마음이다.

지혜자의 조언을 따라 개미가 살아가는 방식을 꼼꼼하게 관찰해야 한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라면, 모든 영역에서 두령과 간역자와 주권자의 유무와 무관하게 사랑의 자율성을 따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경주해야 하겠다. 행위의 속도와 지구력 문제는 게으름의 본질이 아니라 결과다. 사랑의 자율성이 없으면 누구도 게으른 자의 혐의를 털어내지 못한다. 진정한 순종의 주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율성의 소유자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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