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일 금요일

헤세드와 다아트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엘로힘) 아는 것(다아트)을 원하노라 (호6:6)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법의 달인이다. 제사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서 소통의 창구였다. 제사를 통하여 죄인은 하나님을 향해 화목의 첫걸음을 내딛였고 번제는 완전한 헌신과 희생의 증표였다. 그런데 그런걸 다 접으란다. 그런 거 꼴도 보기 싫다는 뉘앙스도 감지된다.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은 제사와 번제의 부재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 문제였고, 그가 진정으로 기뻐하신 인애와 지식의 빈곤이 문제였다. 이런 문맥에서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아담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파기 핵심은 헤세드와 다아트 문제였다. 이웃 사랑이 없었고 하나님 지식이 없었다는 거다.

선악과를 따먹고 율법을 거스르는 행위는 결과였다. 당연히 선악과의 원상복귀 및 율법적 명제의 꼼꼼한 준수는 근원적인 해법이 아닐 것이다. 행위의 복원으로 수습될 문제가 아니라 속사람의 변혁을 요청하는 사안이다. 자아가 늘 해법의 마지막 방해물로 있는 한, 어떤 자구책을 마련하는 식으로는 도무지 풀어지지 않을 일이겠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것 외에 다른 뽀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확증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셨고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절정이 되시었다. 사랑이든 지식이든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건 당연하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기뻐하는 아들이다. 죄인이요 원수였던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신 사랑 때문이며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 지식에 완벽하게 정통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헤세드와 다아트의 총화시다. 첫번째 아담이 파기한 언약의 진정한 회복은 두번째 아담의 몫이었다. 인류는 첫번째 아담의 언약파기 행보를 답습했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두번째 아담이 회복시킨 언약의 수혜자로 살아간다. 수혜의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헤세드와 그로 말미암는 엘로힘 다아트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최상의 선물이란 얘기다.

때때로 축복을 고단한 수고로 여기고 선물을 건조한 관념으로 여기는 자신과 마주친다. 호세아 선지자가 목젖이 떨리도록 강한 호통의 고음을 빚어낼 일이겠다. 멸망의 첩경인 줄도 모르고 나른한 일탈의 발걸음 내딛는 일 없도록 정신줄을 팽팽하게 당겨 헤세드와 다아트의 조합이라 할 언약을 또다시 짓뭉게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오늘은 왠지 내게 인애가 있는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지, 언약을 언약으로 존중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성찰하는 하루이고 싶다. 인애와 지식이 어우러진 언약의 수혜자로 제대로 살아가는 하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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