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3일 수요일

비움과 참여의 미학

아바 아버지여 당신께는 모든 것이 가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하나님의 속성이 아들의 관점에서 고백된 구절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오직 자신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모든 것들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무제한적 자유가 여기에 언급된 속성이다. 사람들은 이런 개념을 경계하는 동시에 열망한다. 타인이 가져서는 안되고 나만이 가져야 한다는 뜻이겠다. 그러니 '전쟁'은 규모와 무관하게 필연적인 귀결일 수밖에. 교회든 사회든 사람들이 출입하는 길목마다 벌어지는 권력과 이윤의 추한 쟁탈전은 일상처럼 흔한 광경이라 낯설지가 않다. 모든 사람들이 무소불위 권력과 막대한 부의 축적을 미친듯이 희구한다. 이유는 절대적인 능력의 확보로 무제한적 자유를 구가하고 싶어서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으로 인해 주에게서 멀어지는 무능과 부자유의 실상도 모르고서 말이다.

본문은 온 몸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강한 절박함이 쏟아낸 겟세마네 기도의 핵심이다. 전능과 자유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어떠한 차등이나 우열이 없는 공통적인 속성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셨고 당연히 전능의 속성을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우리의 성향과는 반대로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고 철저한 무능과 전적인 부자유를 의미하는 죽음의 벼랑으로 스스로를 내모셨다. 그리고는 전능이 오직 아버지께 있다고 고백하며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란다. 이는 인간 문맥에서 보면 정신나간 부적응아 취급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겐 반드시 본받아야 할 전적인 자기부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전적인 의존의 전형이다.

절대적 능력과 무제한적 자유는 그것이 없어서 당하는 불이익과 부당함 때문에 있기만 해도 좋겠다는 기호의 대상이지 그 자체로 가치인 것은 아니다. 가치의 산출은 활용의 영역이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로 썩는다는 법칙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모든 역사의 줄기찬 교훈이다. 문제는 권력과 자유의 유무가 아니라 늘 자신을 향하는 이기적인 활용의 부끄러운 수준이 문제겠다. 인간은 본질상 절대적인 권력이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무제한적 자유도 수사학적 욕망일 뿐이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무한한 간극을 망각하면 허망한 욕구에 일평생 종노릇할 수밖에 없어진다. 인간은 유한하며 의존적인 존재이고 자유에 있어서도 허용되고 만들어진 자유를 구가할 뿐이다.

유한하기 때문에 무제한에 대한 갈증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지극히 정상이다. 창조의 의도였다. 우리는 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찾고 구하도록 지어졌다. 안식의 궁극적인 처소는 하나님 자신일 수밖에 없도록. 우리의 능력과 기호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절대적 권능의 무제한적 자유에 참여하게 된다. 전능과 자유는 하나님의 원대로 활용될 때 최고의 가치를 산출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맡겨지면 온 인류가 집단으로 위험에 처해진다. 능력과 자유가 커질수록 위험도는 높아진다. 자신의 소원을 철저히 부인하고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맡기는 올바른 무능이 예수님의 기도가 가르치는 교훈의 핵심이다. 이는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비참이라 할 죄문제가 해결된 방식이다. 동시에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절묘한 비법이다.

'내가 강할수록 약해지고 약할 그때에 비로소 강하다'는 역설의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다. 전능의 자발적 박탈과 자유의 자발적 포기가 십자가의 지혜와 능력이다. 예수님이 가지신 것을 부인하신 것보다 우리가 우리의 없음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인데도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기에도 버거운 게 현실이다. 여기에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전능과 자유가 우리의 전인격을 관통하고 하나님의 신적인 기호가 생산하는 가치로 휩싸인 인생의 부요함이 들풀의 영광만도 못한 황제의 영광보다 비교할 수 없도록 낫다는 발상 말이다. 호흡이 코에 있는 인생에게 능력과 자유가 있다면 수에 칠 가치나 있겠는가!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적인 차원의 능력과 자유를 구가하며 영원한 가치 생산에의 참여가 가능하다.

이건 움켜쥐는 소유의 경제학이 아니라 서로에게 여백이 되어주는 참여의 미학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는 내 안에 거하시는 신비로운 소유를 위한 비움과 무소유의 지혜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배운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의 소원대로 무엇이든 되어지는 게 나의 벅찬 바램이다. 하나님의 전능이 나에게 강함이 되고 그분의 최상급 기호가 나의 소원이 되는 십자가의 자유보다 더 월등한 생의 비법이 있으신 분들은 재보해 주시라. '사글세'를 빼서라도 배우겠다. 그러나 십자가 외에는 알지도 않겠고 자랑할 것도 없다는 게 Paul의 판단이다. 무시로 개발되는 처세술이 특이성 때문에 일시적인 흥미유발 효과는 있겠으나 생이 종결되기 전까지 죄와의 전쟁이 중단되지 않는 게 생인지라 거품 이래저래 걷어내면 결국 십자가 뿐이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