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3일 수요일

신을 바꾸다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렘2:11)

세계 전역에 특사를 보내서 각 나라의 종교성을 확인해 보라신다. 한 나라의 영광인 신을 다른 무익한 것으로 대체한 민족은 지구촌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겠다. 조상들이 물려준 종교적 문화에 최소한의 예를 갖추는 게 후손들의 도리이다. 어느 민족이든 신을 바꾸는 개종은 가장 불경한 일로 여기져서 이슬람의 경우는 각 가문과 공동체 안에서 개종자의 사적인 처형까지 눈 감아줄 정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랬단다. 하나님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다. 이는 하늘도 놀라고 떨고 두려워할 일이라고 선지자는 기록한다. 그러면서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궁극적인 고통이요 악이라고 진단한다.

나도 하나님을 신 아닌 것과 맞바꾸는 일에 민첩하다. 그런 거래는 때때로 의식의 속도보다 빨라 나 자신도 그러는 줄 모르는 중에 벌어진다. 흉측한 금송아지 건립하는 것 외에도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일일이 하나하나 지적하고 제거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들뢰즈의 처방과 처신처럼 스스로 지구를 떠나는 자실이 유일한 해법일 수밖에 없다. 근본적인 것은 역시 하나님을 그분답게 알고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계명을 달리 표현하면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욥이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 인물이라 한다면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면 찬동의 고개가 숙여진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던 욥의 근본적인 문제와 한계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누구냐' 문답법의 핵심은 욥이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에서 행위의 주체로 소급하여 하나님을 아는 귀납법이 인간적인 지식취득 원리라는 맥락에서, 하나님은 오늘날 기독교인 과학자가 탐구의 삽바를 거머쥐고 일평생 매달려도 좋을 탁월한 자연과학 물음들을 욥에게 내미셨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미천함을 고백하며 손으로 경박한 입술의 우둔함을 가리기 시작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찌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고 고백했던 욥이지만, 막상 하나님의 직접적인 물음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승복했다. 하지만 욥의 그런 겸손의 모습을 보고서도 하나님은 욥에게 대장부의 어깨를 펴고 대답할 것을 다그치며 '누구냐' 식 질문들을 한 무더기 더 쏟으셨다. 이에 동방의 의인은 무소불능 하나님을 고백하며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는 하나님의 첫번째 물음에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했다'고 답하면서 자신의 가벼운 존재감을 티끌과 재에 비유하며 심오한 차원의 회개로 대화를 끝맺어야 했다.

매사에 '하나님이 누구냐'는 물음에 이끌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다른 것과 맞바꾸는 무의식적 불경은 누구든지 언제든지 얼마든지 저질러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만물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밝히 보인다는 바울의 고백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쯤되면, 신앙이 뭐 이리 번잡하고 까다로운 일이냐고 따질 법도 하다. 그러나 그런 인상은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와 결부된 것이다. 하나님이 싫으면 까깝해서 미칠 일이겠다. 그러나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무시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면초가 상황을 사랑의 안목으로 본다면 해석이 달라진다. 하나님이 진실로 생수의 근원이고 최고의 영광이고 최고의 기쁨과 만족과 상급이라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부일 수밖에 없도록 상황이 꼼꼼하면 할수록 더 세심한 배려와 사랑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본받으라 한 바울의 신앙이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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