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8일 금요일

높으신 자에게로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호세아 7:16)

성경에서 회복의 방법은 새롭게 된다는 혁신이나 변혁이 아니라 돌이키는 것이다. 종교개혁 정신의 핵심도 진리의 새로운 고안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해 아래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언제나 본질은 그대로고 기능의 변화만 미친듯이 일어났다. 자동차는 발의 연장이고 인터넷은 대화의 연장이고 인공위성 및 현미경과 망원경은 눈의 연장이고 핵무기는 주먹의 연장일 뿐 인간의 궁극적 가치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들이다. 기능의 신장과 유용성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인간의 가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회복의 방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돌이켰다. 그러나 돌이킴의 종착지가 문제였다. 높으신 자에게가 아니었다. '곡식과 새 포도주 때문에' 돌이켰던 거다. 돌이킴의 방향이 과녁을 벗어났다. 먹고 마시는 게 과녁이고 하나님은 거기에 이르는 방편으로 동원된 셈이었다. 주님께서 돌이킬 수 있도록 '팔을 연습시켜 강건하게 하였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악을 꾀하는 도구로 쓰였단다. 그래서 '속이는 활과 같다'고 비유했다. 빗나간 돌이킴을 주도한 방백들은 결국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 신세가 될 것이란다.

진정한 회복은 언제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풍요와 건강과 편리는 물론이고 지혜와 정직과 겸손과 관용과 친절과 사랑과 연합과 화해와 용서와 지식과 긍휼과 거룩과 영생조차 우리가 돌이켜야 할 회복의 종착지가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대개 하나님께 돌아간 결과이다. 결과가 원인의 필연성을 강제하지 못한다면, 하늘과 땅에 나의 사모할 자는 오직 여호와 뿐이라는 고백만이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 돌이킴이 우리에게 있다면 힘과 뜻과 마음과 목숨까지 수단으로 삼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생의 최상급 가치가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적었다'는 호세아의 잇따른 기록에서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그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이되 전인격을 수단으로 삼은 것이라면 결국 인생을 위하여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복은 우리 자신이 수단이 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예기겠다.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것, 즉 사랑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까지 수단으로 삼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의 종노릇만 일삼았던 애굽 시절의 그 비참한 조롱거리 신세로 돌아가는 것과 일반이다.

호세아는 결구에서 다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자' 한다. 그리고는 여운이 짙은 물음을 남긴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의인만이 그 도에 행한다'는 자답으로 호세아는 깨달음과 지식을 행함과 연결하고 이렇게 실행하는 자가 의인으로 알려질 것이라는 지적과 함께 예언의 붓을 꺾었다. 아무리 유익하던 것들이라 할지라도 회복의 종착지에 이르지 못하도록 걸음을 현혹하는 유익이라 한다면 바울처럼 언제든지 해로운 배설물로 여길 수 있어야 하겠다. 어느때나 배설물 자랑은 각광을 받았고 경쟁도 치열했다. 돌이키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가는 교회의 회복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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