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7일 목요일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는 분이로다 (시33:15)

벌거벗은 느낌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행사를 아신단다. 의식을 마비시킨 대목은 하나님이 일반의 마음을 지으신 창조자의 자리에서 아신다는 앎의 천상적인 질이었다. 도대체 지으신 창조자가 지어진 창조물을 아신다는 것은 어떤 차원일까? 상상력의 근육이 뻗뻗해질 수밖에 없는 물음이다. 피조물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완벽한 지식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일텐데, 그 분량과 정도가 도무지 가늠되지 않아서다. 서로의 지식이 적당히 가리워진 사람들 사이에는 소통이 필요하고 비로소 관계가 맺어진다. 음이든 양이든 지식이 자랄수록 관계도 깊어진다. 만물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을 고려할 때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쉽게 그려지질 않는다.

누군가가 나를 알고 있다면 두려움이 앞설 것이다. 모든 인간이 떳떳한 것보다 켕기는 게 많아서다. 나에 대한 타인의 지식이 깊을수룩 두려움도 가중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강점은 은근히 노출하고 약점은 가리거나 미화한다. 관계를 맺더라도 솔직한 민낯으로 만나지 않고 사회적 아바타로 얼굴을 가린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이는 이미 상식이고 암묵적인 합의이다. 물론 가리는 문화는 아담과 하와의 태초로 소급된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지칠 줄 모르고 그 콘텐츠의 종류와 분량이 줄기차게 급성장한 문화가 바로 은폐의 문화였다. 그 배후에는 죄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어서 들키지만 않는다면 좋겠다는 일반의 심사가 작용했을 터다. 자기 양심의 조밀한 그물망도 투과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 벗겨먹을 심산으로 약점의 은밀한 꼬투리를 물고 늘어지실 분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시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지식의 분량과 사랑의 질이 비례적 관계를 가졌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아시면 아실수록 우리에게 좋은 일이겠다. 남편과 아빠로서 아내와 자식들을 아는 나의 지식은 유한하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사랑이 그 지식의 한계선 밖으로는 확장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제한이 없으시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아는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높고 깊고 길고 넓으시다. 당연히 자애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택하는 게 현명한 일이겠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할 수 없으시다. 아시면서 모른 척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지각이 미칠 수 없는 영역까지 다 커버할 것이다. 주먹 한 덩어리의 뉴우런을 펼쳐서 커버할 수 있는 지각의 영역이 지구의 표피만도 못하다면,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시고 지으신 자로서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분량일 것이다. 그런 무한한 차원의 지식이 무한한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가 겨우 알고 느끼고 경험하고 확인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의 일각의 일각일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고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갑절로 급하게 박동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동시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그분을 만홀히 여기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섬뜩하고 오싹한 마음 가누지를 못하겠다. 스스로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려는 그런 무례함이 가슴 한 구석에서 음흉한 미소를 퍼뜨린다. 죄가 청하는 가증한 결탁의 악수를 뿌리치지 못하고 슬그머니 거머쥐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죄를 범하여도 탈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나와 동류로 여기려는 사악함이 무시로 의식을 자극하고 때때로 장악한다. 방자함의 이러한 극치에 이르러도 하나님의 이렇다 할 반응이 감지되지 않으면 급기야 무신론의 땅 출입도 불사한다. 인간이 이렇다. 자신의 무지로 하나님의 전지를 덮으려는 것과 일반이다. 하나님의 침묵과 인내를 그렇게 해석하고 처신한다. 

주님께서 제대로 반응하면 끝장인 줄 모른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기 때문에 진멸되지 않고 있다는 선지자의 통찰을 애써 외면한다. 하나님을 제대로 두려워할 만큼 두려워할 자가 없다는 시인의 지적은 너무도 정확하다. 하나님은 일반의 심사를 지으셨고 모든 행사를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침묵과 인내는 몰라서 초래되는 무지의 무반응이 아니었다. 아시면서 우리가 돌이킬 회복의 시간적인 여백을 마련하신 거다. 아시면서 그러셨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온갖 일들을 그 원인과 출처와 정도와 성격과 본질과 목적까지 아시면서 여전히 아침마다 죄인과 선인에게,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빛을 비추시고 적당히 비도 내리시는 거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참 무지하다.

주님의 사랑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터질 듯하다.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도무지 측량되지 않아서다. 아예 가슴이 터지도록 그분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념해야 할 일이겠다. 동시에 그런 사랑이 우리의 무지와 무신경에 눌려 침묵으로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가슴을 터지게 만든다.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셔야 할 일이겠다. 이러한 극과 극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현실을 하루하루 관찰한다. 이중창을 투과한 뒷뜰 풍경은 환한 햇살로 수북하다. 출처모를 바람이 준동한 나뭇가지 부딛히는 가벼운 소리가 그 풍경과 어울린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오늘도 연장되나 보다. 일반의 마음이 그렇게 느끼도록 의도하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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