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0일 토요일

나눔의 예술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처럼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9:22)

믿음의 조상이 부르심을 받을 당시에 주어진 정체성은 복의 근원이다. 아주 특이하다. 복을 취하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줌으로써 취하는 자보다 더 큰 진정한 복을 누린다는 원리이다. 하지만 이 원리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냉담하다. 모두가 보다 큰 복을 원하지만 주어야 한다는 복취득 방식은 껄끄럽다. 손실이나 낭비라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이다. 그러나 주는 자의 길을 선택하는 소수가 보인다. 참으로 귀하다. 하지만 좁고 협착하다. 역시 큰 복은 쉽게 주어지지 않나보다. 주는 자가 된다는 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어서 그렇다. 바울의 고린도 서신에서 주는 자의 비책을 입수했다.

핵심은 받는 자의 처지가 되라는 것이다.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유대인에 대해서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과 무관한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되라는 것이 바울의 조언이다. 여기에는 부자가 되더라도 가난한 자와 구별하지 말고, 육중한 분량의 지식을 생각 주머니에 챙겼다고 해서 지적 빈곤자와 구별하지 말고, 권력의 고지에 둥지를 틀었다고 해서 제도권 밖 사람들과 구별하지 말고, 유력한 가문을 배경으로 가졌다 할지라도 고아 및 과부와 이질적인 신분인 것처럼 유세 부리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런 유치한 구분으로 뿌듯한 쾌감에 젖는 졸부들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주님은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처럼 되시었다. 방법과 내용이 동일하다. 주님 자신이 선물이 되시면서 수단도 되시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준다는 것은 사실 자신을 준다는 것이다. 쓰다가 남은 것을 후련하게 처분하듯 타인에게 소유권을 양도하는 것은 주는 것과 무관하다. 그러면서 낯뜨거운 생색은 있는대로 다 챙긴다. 주는 자가 됨이 없이는 주는 행위도 없다. 존재의 선행 없이는 행위도 없다. 주는 자가 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럴 위인이 아닌데도 그럴듯한 행위를 하면 그건 가식 내지는 위선이다. 타인과 스스로를 동시에 속이는 것이겠다. 주는 자란 늘 자신을 주는 자라는 의미이다.

약한 자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할 때 강한 자의 뻣뻣한 신분을 고수하면 받는 자는 거북하고 불편하다. 이게 불쾌한 쓰레기 처분인지, 민망한 동정인지, 가식적인 인기관리 방편인지, 아니면 교모한 댓가성 투자인지, 꺼림직한 의심이 사방으로 밀려오기 때문이다. 자신을 주지 않고 멀찌감치 물러선 나눔의 역기능 혹은 부작용은 받는 자도 불편하고 주는 자도 개운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동등한 관계성은 변질되고 공동체 내에는 신분의 벽이 올라가고 결국 사회는 묘한 위화감과 적대감에 휩싸인다.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그러하다. 이는 주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다. 보다 큰 복을 쉽게 챙기려는 안이함 때문이다.

주는 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닮는 첩경이며,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자가 된다는 것이며, 받는 자와 나란히 있는다는 것이며, 내가 아니라 받는 자의 양심을 따라 행하는 자이며, 주고 난 이후에도 내가 주었는지 누구에게 주었는지 무엇을 주었는지 계산하지 않고 주는 행위 자체를 생산하고 다른 일체의 대가를 구하지도 바라지도 아니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세상의 기부문화 평균치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교회의 현실은 어찌된 연고일까? 우리 세대가 풀어야 할 긴급한 숙제라 생각한다. 나눈과 섬김이 예술의 경지를 웃도는 실천의 뿌리가 교회에 편만하게 뻗어내릴 때까지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함께 각오해야 하겠다.

참으로 오랫동안 나는 받는 자의 자리가 익숙하다. 받는 자의 자리를 언제쯤 털고 일어나 주는 자의 우등한 복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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