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9일 화요일

용서의 위대함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3:13-14)

용서는 죽음의 연습이다. 나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는 상대방의 모난 성품과 뾰족한 독설을 용납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죽기보다 어려운 게 용서인지 모르겠다. 죽어서도 한이 해소되지 않아 그걸 후손에게 물려주는 경우도 있어서다. 심지어 믿음의 용장 다윗도 이런 원한의 찌질한 되물림 문화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요압으로 하여금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나 시무이가 과거에 자기에게 행한 일을 무죄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을 다윗은 그 중요한 유언장의 절반이 넘는 지면을 할애하여 곧 왕위를 계승하게 될 아들에게 건내주는 꼼꼼함을 보였을 정도다. 다윗의 못난 구석을 들추자는 게 아니다. 용서가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용서는 우리 스스로의 실력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은혜가 필요하다. 그 은혜의 핵심은 주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이다. 용서의 가능성과 실현성은 거기서만 찾아진다.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에 뿌리를 두지 않은 용서는 불안하다. 무늬뿐일 가능성이 높아서다. 사람들은 분과 노를 그런대로 많이 다스리면 그게 용서인 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이신 용서는 차원이 달랐다. 용서하면 독생자의 생명까지 포기해야 하는 극한적인 '피해'가 수반되는 용서였다. 그리고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였다. 이번만은 지나가 주겠으나 반복되면 국물도 없다며 응징의 주먹을 보여주는 일회용 용서가 아니었다.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완전한 용서였다.

본문은 온전한 용서가 용서 자체로만 구성되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역설한다. 온전한 용서의 깔끔한 마무리는 역시 사랑이다. 사랑의 띠로 온전하게 매지 않으면 용서는 일종의 보복으로 전락한다. 용서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용서는 하겠는데 다시는 보지 말자'는 격이겠다. 이건 보복이다. 분노를 삭이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용서는 사랑까지 이르러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가 그러했다. 죄에서 건져내신 이후에 우리를 안면몰수 하시지 않으셨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떠나시지 않고 영원히 동거해 주신단다. 피조된 시공간의 어떠한 것도 단절할 수 없도록 우리와 당신을 사랑의 온전한 띠로 묶으셨다. 이 사랑은 아무도 변경하지 못하도록 만지지도 못하게 하셨다. 보증으로 성령까지 보내셨다. 용서는 이런 꼼꼼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랑으로 완성된 용서의 표본은 성경의 시작부터 등장한다. 요셉 이야기가 그렇다. 창세기의 결론은 요셉의 용서 이야기로 끝맺는다. 요셉의 용서는 가장 가까운 일촌의 잊혀질 수 없도록 가장 쓰라린 배신을 용서하되 가해자의 삶과 그 자손들의 삶까지 보장하고 책임지는 위대한 사랑을 더한 용서였다. 손양원 목사님도 사랑의 지문이 가장 짙게 묻었을 장남과 차남을 살해한 가해자를 용서하되 그를 양자로 삼는 사랑으로 온전한 용서의 마침표를 찍으셨다. 고개가 숙여진다. 용서의 위대함이 밀려온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나의 연약한 존재를 압도하는 용서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사건이 없었다. 오히려 늘 타인에게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세월을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고작 말씀에 묻혀 용서의 비밀을 관객의 자리에서 은미하고 있을 뿐이다.

용서의 저울질이 삶을 노크할 때 쌍수로 환영할 준비는 미리미리 해 두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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