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5일 화요일

구제의 은밀함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레19:10)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구제의 원칙이다. 그러나 이런 은밀함의 원칙은 점진적 계시가 절정에 이른 예수님의 때에 비로소 반포되지 않았다. 율법이 주어지던 첫 순간에 이미 구체화된 원칙이다. 계시의 점진성은 내용의 추가가 아니라 의미의 판명성과 관계된 것임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물론 예수님이 '새 계명'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추가하신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 계명이 있다. 허나 요한은 이것도 처음부터 가졌던 옛 계명이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과 같은 방법론의 추가일 뿐임을 잘 지적했다. 물론 꼼꼼히 따지자면 방법론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으로 주겠다는 말씀에 함축된 것이기에 '새롭다'는 수식어 붙이기가 어색하다.

본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제의 은밀함이 저변에 짙게 깔린 계명이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고 떨어진 열매는 줍지 말라'는 부분은 낭비와 손해를 권유하는 듯해 그 첫인상이 낯설다. 그러나 분명한 두 가지의 합목적적 이유로 제시된 명령이다. 첫째,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의 구제를 위함이다. 포도원의 수확하지 않은 열매와 떨어진 것들은 그들의 몫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들에게 전달되는 절묘한 방식이 예술의 경지에 가깝다. 공급자와 수혜자가 서로 민망하게 대면할 필요가 없는 방식이다. 재화의 이동으로 인한 두 당사자 사이의 미묘한 주종관계 형성을 차단하는 방식이다. 구제를 해도 보상의 책무와 기대가 각자에게 촉발되지 않는 방식이다. 공급자는 생색을, 수혜자는 불쾌한 동정의 느낌을 가질 수 없는 방식이다. 공급자는 오직 은밀히 갚으시는 하나님만 기대하고 수혜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면 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접고 과수원 주인이 될 필요까진 없다. 교회에는 '헌금' 문화가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기 19장의 정신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일단 '헌금 실명제'를 폐기해야 한다. 헌금의 액수가 바닥까지 추락할지 모를 가슴 철렁한 제안인 줄 안다. 이런 위기감 자체가 중병의 증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가 가난을 감수하고 오른손의 일을 왼손은 물론 타인의 손까지 알도록 적극 들키려는 생색의 여지를 말끔히 제거하는 것이 교회가 영적 부요함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한다. 헌금의 근수에 기반한 권력 키재기도 사라질 효과까지 기대되는 처방이다. 연말정산 소득공제 혜택과의 남루한 거래 혹은 금전적인 투자 개념으로 헌금의 정신이 훼손되는 것도 방지된다. '헌금 실명제'만 폐기해도 이렇다. 이런 제안이 불편한 분들은 지원군을 찾아 성경구절 부지런히 뒤지시면 되겠다.

본문의 두번째 궁극적인 의미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우리의 여호와란 사실에서 발견된다. 구제 이야기는 구약과 신약이 동일한 맥락에서 등장한다. 즉 은밀한 구제는 하나님의 주시는 속성과 그의 백성된 우리의 신분 때문이다. 구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은밀한 중에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도록 무수한 은총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구제 방식에 비하면 아주 간소한 흉내요 조촐한 연습에 불과하다.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늘 주시는 분으로 계시되 우리가 땅의 지각으로 능히 감지할 수 없는 은밀한 방식으로 당신 자신까지 선물의 항목으로 포함시킨 분이시다. 우리 자신이 타인과 이웃에게 주어질 것을 의식하고 구제하되 은밀함이 보존되는 방식으로 예술의 경지까지 이르는 섬김의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다.

아~~ '너나 잘 하세요' 항목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일평생 하나님의 진리 한 조각만이라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턱도 없는 소리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지향점은 변경되지 말아야 하겠기에, 교회가 구제의 예술적 은밀함을 통해 하늘의 진품이 전시되는 겔러리가 되면 좋겠다는 바램은 가슴에 끝까지 간직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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