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0일 일요일

마음의 즐거움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 것이로다 (시105:3)

즐거움은 자발성의 가장 기초적인 토양이고 즐겁지 않으면 모든 게 고역이다. 비자발적 삶을 마지못해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인생은 없다. 삶이 예배라면 타율성에 떠밀린 인생은 억지로 드리는 예배일지 모른다. 물론 외부의 타율을 외면해도 될 정도로 녹록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만 잘 한다고 해서,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형통의 대로가 인생에 거침없이 뚫리는 게 아니어서 그렇다. 이는 또한 지구촌 인구의 중다한 수효만큼 많은 사연들이 한 개인의 생을 마치 뒤엉긴 실타레와 같이 휘감고 있어서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속사정을 슬쩍 찔러 보면 곧장 심장을 후비는 듯한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들을 와르르 쏟아낸다. 나라와 민족도 사정은 동일하다. 삶이 너무나도 고달프면 자신의 호흡을 스스로 제거하는 일도 발생하고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고삐 풀린 살육전 돌입도 불사하다. 이는 생의 비참보다 죽는 게 낫다는 판단의 현실화고 비참의 문제를 스스로 풀고 땅에서 해법을 얻으려는 시도라고 하겠다.

즐거움의 상실은 비극이다. 그 빈자리는 언제나 근심과 슬픔과 분노가 차지한다. 근심으로 인생의 견고한 등뼈가 썩어가고 슬픔으로 마음의 든든한 제방이 무너지고 분노로 인해 행위의 건실한 규범이 와해된다. 즐거움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하다. 그런 회복으로 인해 인생의 표정은 밝아지고 민족의 신수도 훤해진다. 그러나 땅바닥에 떨어진 돈처럼 해 아래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시인은 마음의 즐거움이 여호와를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모든 게 그렇듯이 마음의 즐거움도 신비로운 현상이다. 마음을 존재로 부르신 분도 주님이요 마음이 작동하는 원리도 주님이 조성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렇게 신적인 기원을 가진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태생적인 속성이다. 변경과 조작이 불가능한 창조의 원리라는 얘기다.

물론 웃을 때에도 마음의 저변에는 슬픔이 있고 그 말미에 껄끄러운 근심이 예외없이 끼어드는 조작된 즐거움이 없지는 않다. 모두 땅에 기초한 경우겠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구할 때에 즐거움이 생기도록 지어졌다. 그런 생기를 인간에게 주입하신 거다. 그러니 썩어 없어지는 것에서는 도무지 만족하질 못한다. 은을 좋아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는 전도자의 지적은 정확하다. 해 아래의 것으로는 마음의 즐거움에 이르지를 못한다는 얘기다. 인간이 그렇게 지어졌다. 하늘과 땅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여호와 뿐이라는 것은 창조의 원리에 지극히 충실한 자세이다. 인간을 위해 6일동안 준비된 만물과 자연은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과 능력을 즐기며 그분을 노래하는 안식처다. 가난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한 일들이 산더미로 짓눌린 인생의 진정한 해방구는 창조적 질서의 회복에서 찾아진다.

'여호와'를 구하는 질서의 회복에서 마음의 즐거움이 회복된다. 우울증도 저리 비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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