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1일 목요일

사람의 영광을 경계하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다 (요12:43)

이는 신앙을 가졌으나 출교의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공적으로 주라 고백하지 못하는 소심한 혹은 비겁한 관원들 이야기다. 그런데 읽으면서 움찔했다. 나도 그런 관원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거북한 느낌 때문이다. 단순히 느낌의 예민함 때문이 아니라 양심조차 거부의 손사래를 치지 못해서다. 물론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양태는 관원들과 다를 것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언급된 관원들과 나 자신이 전혀 다르지가 않다. 생각과 행실이 사람의 영광에 의해 조정되고 그것에 헐떡이는 삐뚤어진 기질을 가졌는데 표출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의 영광이 가진 중독성과 해악성에 단호히 대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아마도 최상의 해법은 하나님의 영광에 중독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영광(독사)'의 의미는 좋은 평판, 칭찬, 명예, 존경 등이겠다. 문제는 사람의 그런 영광이 마치 마약처럼 우리의 삶을 한번 건드리면 우리 스스로가 그것에 의한 자율적인 결박을 택한다는 것이다. 대중의 박수갈채 맛을 즐기면서 중독되어 해어나지 못하는 유명인의 이름을 굳이 거명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겠다.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하루라도 복용하지 않으면 삶의 근육이 마비되고 명분과 의미가 실종되는 현상들은 낯설지가 않다. 어쩌면 이러한 증세가 교회에 가장 심각하지 않을까도 생각한다. 특별히 설교자의 자리가 위태롭다. 처음에는 은혜로운 말씀을 증거하여 성도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소망을 심어주는 진리로 안내하는 기쁨에 취하다가 나중에는 설교가 하나님의 기쁨과 무관하게 사람들의 영광을 취득하는 방편으로 추락하는 막장이 쉬 펼쳐지기 때문이다. 

글쓰는 작가들도, 가르치는 선생들도 자유롭지 않다. 하나님의 진리를 기술하고 가르치는 것과 사람들의 심성을 자극하여 영광을 끌어내는 것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다. 그런 모호함이 은밀한 거래를 조장한다. 맛깔스런 글과 교훈을 생산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퍼뜨리는 수단인지 사람들의 칭찬을 낚으려는 떡밥인지, 하나님과 본인은 구분한다. 그러나 타인은 그런 은밀한 동기를 모르기에 대부분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방하고 속으로는 사람의 영광을 은밀하게 챙긴다. 여기에 자신의 양심이 민감하게 반응하면 자기최면 내지는 망각으로 대응한다. 이는 타인에게 발각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양심조차 거리낌이 없어지는 일거양득 신공이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고? 내 안에서 수시로 벌어지는 일들이다. 본문을 읽다가 움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기도 하고. 

나는 앞으로 설교하고 글쓰고 가르치는 일에 종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더 오싹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 사이의 택일 문제는 일평생 우리의 삶과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격정적인 화두임에 분명하다. 본격적인 현장에 뛰어들기 전에 그런 선택의 본질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사람의 영광에 쉬 빠지지 않도록 적당한 무신경도 준비하고 그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영광에 중독되는 경우를 위한 자기만의 비상용 해독제도 구비해 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구차한 부산을 떨지 않아도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생의 제일가는 목적에 전적으로 중독되어 헤어나올 수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나. 그러나 그런 야무진 꿈은 일찌감치 접으련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니까. 

오히려 복음을 증거한 이후에 버림이 되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까지 쳐서 복종시킨 바울의 비법에 눈길이 끌린다. 동시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으나 이스라엘 백성과 장로들 앞에서의 채면은 구겨지지 않도록 사무엘로 동행해 달라고 구걸하는 사울의 서글픈 모습도 연상된다. 사울의 비참한 종말을 반면교사 삼고 바울의 고단한 길 택하는 것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 그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