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3일 토요일

하나님의 은혜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15:10)

많은 분들이 구원은 홍해를 건너는 것이고 성화는 요단강을 도하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홍해는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 갈라졌고 요단강은 그 이후에 갈라졌기 때문에 전자는 전적인 은혜이고 후자는 우리의 주도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해석도 당당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부유한다. 그렇게 생각해도 될 여지가 없지는 않겠으나 조심해야 할 암초들도 눈에 걸린다. 즉 구원과 성화의 단절적인 구분도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며, 그런 구분에 근거하여 전적인 은혜를 '구원'과만 결부시켜 다른 부분들은 마치 인간의 주도권이 마음껏 발휘되는 영역인 것처럼 여겨 하나님의 주권을 배제하는 듯한 태도는 심히 경계해야 할 오만일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는 소위 '황금의 사슬(catena aurea, golden chain)'이라 알려진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 등장한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작정하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구속사적 역사전개 방식의 총화 말이다. 여기서는 구원이 칭의만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의 서정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칭의까지 구원이라 말하고 나머지는 구원과 무관한 것처럼 구분하지 않았으며, 그 '구원' 이후의 내용들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맡겨진 것처럼도 묘사하지 않았다. 케커만이 신학의 목적을 '구원 그 자체(ipsa salus)'라고 규정했을 때 그는 로마서 8장에 소개된 구원의 서정 전체를 의미했던 것이다.

구원의 절대적 주체가 하나님 자신이고, 구원의 의미가 로마서의 전포괄적 서정 전체라고 한다면, 성화가 우리의 노력에 달렸다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작정에서 영화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역이고 공로이고 은혜이다. 내게 있는 것들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없으므로 자랑할 것이 없다는 바울의 고백은 이러한 은혜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의 실력을 발휘할 무대가 사라졌다 낙망하는 분들은 이런 은혜론이 인간의 노력과 열심을 박탈하여 기독교로 하여금 아무것도 안하는 무사안일 종교로 만든다고 염려할지 모르겠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이다. 기독교는 내가 주체가 되어 모든 에너지를 불태우는 격정적인 헌신의 종교가 아니다. 내가 뭘 하지 않으면 무너질지 모르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의 창조부터 세상 끝날까지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행하셔서 그 은혜에 감격하고 반응하는 삶이 펼쳐지는 종교이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보다 괜찮은 상급을 취득하는 그런 차원의 열심이 고개도 내밀지 못하는 게 기독교다. 그럼 우리는 뭐냐고 따질법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하지만 출중한 석학들도 모르고 세상의 최고 제왕들도 못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행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전부라는 사실에 장악된 사람들은 뭘 연구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때까지 추구하고 뭘 행하여도 하나님 자신이 동기요 능력이요 목적이 되신다는 신적인 규모를 따라 질적으로 다른 열심을 발산한다.

은혜가 결코 나태를 조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적인 규모의 열심이 촉발되는 근원이다. 은혜가 없는 분들의 열심은 감동과 도전이 아니라 민망과 부담이다. 일 저지를지 모른다는 긴장과 염려만 부추긴다. 개인의 삶에도, 교회에도 등장하지 말아야 할 열심이다. 땅에서 없어지는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시간과 재능과 지식과 재력과 체력과 성품이 닳도록 열심으로 살아간 거인들의 배후에는 여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바울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 사도였다. 진실로 그는 '옥에 갇히기도 했고 매도 죽을 정도로 수없이 맞았고 잠도 못잤으며 주렸으며 목마르며 헐벗었고 사방이 위험들로 우겨쌈을 당하는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게 기독교의 열심이다.

히포의 주교(Augustinus)는 '우리에게 있는 것들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에 대한 주석으로 "우리는 어떠한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기에 어떠한 것에서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in nullo gloriandum est, quando nostrum nihil est)는 키프리안 글귀에 감동을 받아 우리의 믿음은 물론이고 가장 지속적인 순종(obedientia perseverantissima)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고백했다. 그의 고백록은 죄인 중에 괴수였던 자신이 지금의 자신이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고백의 기록이라 해도 무방하다. 히포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맹렬한 공격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진리와 씨름하고 저술하는 열심이 멈출 줄 몰랐던 주교였다. 열심에도 종류가 있다.

이러한 선배들의 경건한 열심이 나의 나됨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하는 지점에서 내게서도 시작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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