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9일 화요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리라 (잠16:7)

바울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라고 자문하며 후자를 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이분법적 논법을 구사했다. 그가 일생을 건 복음이 사람의 뜻으로 된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이유도 빠뜨리지 않았다. 사실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것은 과도하다. 윈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좋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이란 초보적 지혜를 바울이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바울은 언제나 타인의 양심을 존중했고 형제를 위해서는 자신이 저주를 받아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까지 끊어진다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도였다. 

본문에는 구체적인 원수사랑 윈윈법이 소개된다. 원수는 개인적인 관계성도 문제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누구를 위해야 하는지의 택일이 요청되는 상황을 상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적인 택일이지 결과적인 택일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의 인과를 제시한다. 한 사람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다른 사람과도 나아가 그의 원수라 할지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원인이고 원수와의 화목은 결과라는 인과에서 우리는 인(cause)과 과(effect)를 이어주는 논리의 끈이 궁금하다. 하나님의 기쁨이 원수와의 화목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과정과 순차적인 단계가 생략되어 있어서 본문을 둘러싼 문맥에 탐구의 시선을 투하할 수밖에 없다.

첫째,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해도 여호와는 보다 깊고 근원적인 것을 감찰하는 분이라는 점이 지적된다. 모든 것을 동시에 보시되 모든 시간까지 영원한 현재로 보시는 하나님의 안목과 찰나적인 부분만 보고 자신의 주관적인 기호에 근거해서 늘 판단하는 우리의 안목이 다르다는 건 천지의 무한한 격차로도 설명되지 않음을 이사야가 잘 말하였다. 둘째, 하나님이 온갖 것들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고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만물의 조화로운 질서와 시간의 절묘한 타이밍과 존재의 개별적인 보존이 모두 신적인 섭리의 손아귀에 있어서다. 하나님의 기쁨이란 늘 온 세상과 전 역사가 관계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은 시간과 공간 전체가 최상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셋째, 여호와를 경외하면 악에서 떠나게 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경외심이 원수에게 노출되는 것은 그와 돌이킬 수 없는 관계성의 막장으로 치닿는 것과는 정반대로 원수로 하여금 악에서 떠나게 하는 영향력을 발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목으로 귀결된다. 다니엘이 바벨론 왕의 제안을 등지고 여호와 경외를 고수했을 때의 일들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원수와의 화목은 그의 비위에 순응하는 원수 중심적인 태도로는 얻어질 수 없다. 처음에는 다시스로 가는 순풍을 만나는 듯하여도 결국은 자신와 원수 모두가 사망의 길로 접어든다. 눈에 걸리는 가까운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께 반응하는 자로 머무는 자기와의 싸움이 화목의 관권이다. 자신과 원수를 살리는 비법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의 행실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 자신이 상급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실 것이라는 거다.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에게는 원수라도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결과도 덤으로 주어진다. 이렇게 하나님의 기쁨과 원수와의 화목과 믿음의 내용을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하는 해석학, 성경 한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편들어 줄 근거들을 닥치는 대로 동원하는 이런 식의 접근법이 다소 비약적인 뚱딴지 어법으로 느껴져 거북할 수 있겠으나 계시의 본질과 성경의 속성과 인간의 언어를 조금만 깊이 숙려해 보면 학문적인 타매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하나님이 성경의 주어라는 사실을 최대한 존중하는 해석학이 나는 좋다.

교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연민에 휘둘리는 판단은 함께 제대로 망하는 첩경이다. 개인도 그러하고 가정의 경우도 동일하다. 인생이 결정의 연속이라 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판단력은 평생을 좌우하는 열쇠라고 해도 무방하다. 범사에 믿음으로 그분의 계심을 인정하고 그분만을 지극히 큰 상급으로 여기며 만족하는 판단력에 어떠한 좌우로의 치우침도 없어야 하겠다. 그러면 외관상의 멸망과 좌절도 즐겁고 유쾌하다. 잠깐 있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인생인데, 성공에 연연하지 말고 주를 기뻐하며 유쾌하게 살자. 그러면 철천지 원수들도 화목의 울타리로 들어온다. 그건 인생의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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