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7일 일요일

원수사랑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히10:30)

예수님은 원수보복 금지를 넘어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하고 축복하라 하시었다. 원수는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되어 어떤 식으로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그걸 180도 뒤집으신 예수님의 발언을 접하면 뾰족한 반감을 넘어 교제의 격한 단절까지 생각하게 되는 게 일반적인 심사겠다. 사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수준의 평형적 보복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보복심 자체를 금하시고 나아가 '사랑 기도 축복'이란 최고의 대우까지 해 주라는 역발상 주문을 접한다면 걸려 넘어지지 않을 위인이 누구일까! 그러나 주님은 틀리실 수 없다는 건 어떤 식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나의 일반적인 상식과 정연한 합리를 접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원수사랑 이유를 꾸역꾸역 추정하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께 죄인이고 원수였다. 그런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으셨다. 원수가 저지른 행악에 준하는 평형적 처벌을 가하지 않으셨다. 최소한 죽음의 삯은 지불해야 하는데 그것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원수사랑' 없었다면 국물도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둘째, 주님은 우리에게 보복하지 않으시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망각으로 없었던 일처럼 지나가신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복 자체가 되셨고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중보하고 계신다. 사랑 기도 축복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었다. 행하신 분이 말씀하신 것이었다. 셋째, 부당한 세상에 반응하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식이란 그 대상처럼 되어지지 않으면 아직은 지식이라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지식을 의미한다. 어거스틴 같이 되어야 어거스틴 신학이 이해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우리의 철천지 원수인 죄와 사단까지 '원수'니까 사랑해야 하는 거냐? 이런 질문, 어딜가나 마주친다. 죄와 사단은 대적하고 미워해야 할 원수다. 사랑하지 마시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갚지 말라고 말씀하신 '원수'는 사람을 일컫는다.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면 사람들 중에 아예 원수가 없다는 얘기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그렇다. 원수가 없다. 우리에겐 '당당하게' 원수로 대우해도 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거룩함과 화평함을 좇아야 할 부르심을 받았다. '원수' 같은 사람을 원수로 대하는 순간 우리의 거룩과 화평은 훼손된다. 이는 악하고 거짓되고 불의한 자들을 가만히 두라는 얘기가 아니다. 합당한 징계와 적법한 치리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게 결코 아니다. 교회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제도이되, 사랑을 따라 집행해야 한다는 거다. 사랑이 빠진 권징의 사법적인 집행은 늘 과도한 분열의 심각한 부작용을 수반했다.

예수님은 신인(Deus-Homo)이기 때문에 원수사랑 가능하신 거 아니냐? 십자가의 발자취 뒤따라간 믿음의 거인들이 있다. 두 사람이 떠오른다. 던져진 죽음의 돌이 온 몸을 소나기로 찍는 순간에도 스데반은 가해자를 향해 사랑의 기도로 축복한 분이셨다. 욥도 처음에는 원수의 고통과 재난을 보고 고소해 한 적이 없었고 원수들이 죽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지도 않았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넘어 가장 가까워서 가장 아프게 한 '원수' 같은 친구들을 결국은 사랑하고 기도하며 축복했다. 이처럼 주님의 은총을 힘입으면, 원수를 보복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의 실현이 가능하다. 원수사랑 계명은 단순히 그림의 떡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경건의 떡도 아니고 우리의 못난 수준을 정죄하고 기죽여 침통한 회개를 낚으려고 던진 떡밥도 아니다. 성도의 정체성과 삶의 실질적인 원리로서 제시하신 것이다. 원수가 없을 수 없다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원수로 여기지 않을 수는 있다.

원수를 보복하는 건 월권이다. 주님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이를 겨우 극복한 보복의 포기는 여전히 소극적인 처방이다. 나에게 원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러나 적극적인 처방으로 사랑 기도 축복까지 나아가면 그건 우리에게 진정한 유익이다. 원수 당사자도 세상의 진정한 빛을 경험하기 때문에 유익이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유념해야 하겠다. 가슴에 맺혀서 생각만 해도 소화가 안되는 분들이 있다면 사랑을 수혈해야 할 대상자 일순위다. 가장 어려운 그분부터 해치워야 한다. 그런 분의 악을 선으로 이긴다면 나머지는 덤으로 해소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인 처세술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고 그의 형상을 닮아가고 그리스도 예수를 비로소 세상에 제대로 증거할 어쩌면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다.

내일은 이걸 영어로 설교한다. '웬수' 같은 영어를 사랑할 호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