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6일 토요일

세상을 판단하라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전6:2)

교회에서 벌어지는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의 부재를 질타하며 지나가듯 던진 바울의 언설이다. 문장의 문법적 구조에 따르면, 성도가 판단의 주체이고 세상은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다. 궁극적인 의미에선 맞다. 그러나 그런 궁극적 의미가 구현되는 방식은 역방향을 취한다. 즉 곁모양은 세상이 성도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수동적인 해석이 썩 달갑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해석을 취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서 신법의 입법자나 심판자가 아니라 늘 준행자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어서다. 이런 판단의 수동성 때문에 이 세상에서 성도들은 어떻게 세상을 판단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양태가 궁금하다.

신명기 4장 6절이 유력한 힌트를 제공한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라 하리라.' 이를 우리의 '논리적인' 지각에 맞추어 풀어보면 이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 열국 앞에서 우리의 지혜와 지식이 되며, 우리의 준행을 통하여 열방은 하나님의 규례를 듣게 되며, 결국 우리에 대해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란 평가가 이어진다. 순종이 지혜를 낳고, 지혜는 열방에 대한 복음의 전파를 낳고, 그것이 성도에 대한 세상의 평가를 낳고, 그런 방식으로 성도는 세상을 판단하게 된다는 예기겠다. 이는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방식의 판단 개념이 반영된 해석이다.

신약에는 요한복음 14장 35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구절이 중요하다. 사랑은 모든 계명의 요약이요 총화이고 결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킨다는 말의 신약적 표현이 '사랑'이란 말이다.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안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이를 뒤집어서 생각하면, 세상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알면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의 빛 앞에서 그들이 '판단'을 당하게 된다는 이해가 가능하다. 우리가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재판정 안에서 판관석에 앉아 재판봉을 두들기는 그림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서 세상의 캄캄함을 드러내는 식이어야 한다.

아버지의 보냄을 받은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우리도 '나를 본 자는 예수님을 보았다'고 할 온전한 순종 즉 전인격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세상을 판단한다. 교회가 흔들리면 세상은 판단의 기준을 상실한다. 기준이 무너지면 방자할 수밖에 없다. 각자의 소견이 기준이다. 나아가 세상의 방자로 끝나지 않고 이방인 중에서 교회 때문에 하나님이 모독을 당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이따금씩 하나님의 존재도 부정된다. 이는 세상에 의해 하나님이 부정적인 판단을 당하시는 격이겠다. 아무리 입술에 땀이 뻘뻘 흐르도록 복음을 증거해도 세상은 '너나 잘 하세요' 반응만 당당하게 보일 '튼튼한' 명분을 우리가 제공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여 세상까지 예수님의 빛으로 판단하게 될 높은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데 집안에서 발생하는 형제간의 분란도 조정하지 못하는 실력으로 어찌 세상의 거대한 규모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내실을 기하는 게 중요하다. 나부터, 가정부터, 우리 교회부터 사랑에 따르는 건강한 판단의 질서를 확립해야 하겠다. 우리의 다짐과 결심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임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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