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0일 토요일

주님의 십자가

이번 고난주간,
보나벤처 붓으로 묘사된
주님의 수난과 죽음 이야기를 읽었다.

중세의 짙은 어두움은
그를 묵상의 끝모를 심연으로 내몰았을 게 분명하다.
원문을 파싱하고 문법을 운운하고
지식의 정확성 추구에 매달리는 것보다
몸과 영혼이 주님의 십자가에 뛰어드는
참여적인 묵상과 글쓰기가 보나벤처 글의 특징이다.

마리아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의 눈동자를 빌리지만
관찰의 목마름은 그들보다 더 갈급해 보인다.
성경 이야기의 행간에 박힌 섬세한 디테일을 읽어내되
특별히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마음에 감정을 이입한다.
십자가 처형의 전 과정에 전 영혼을 쏟아부어 동행했을
유일한 사람은 주님의 어머니일 수밖에 없어서다.

잔인한 채찍이 주님의 등짝을 할퀼 때마다
튀기는 핏방울과 고통스런 신음이 마리아를 엄습한다.
주님의 옷자락은 군병들의 거친 손에 찢겨지고
찢어진 조각은 재비뽑기 방식으로,
주님의 존재가 찢어지는 것이 신적인 진노의 결과인 양
사람에게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그 소유권이 흩어진다.

당국은 좌우에 강도의 십자가를 세우는 간사한 연출 속에서
예수님을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는 군중심리 유발로
혹시 모를 민란의 희미한 조짐까지 꼼꼼하게 차단한다.
아들의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어머니의 찢어지는 가슴과 눈물을 지켜보는 아들의 마음은
땅의 문맥에서 주어지는 가장 육중한 슬픔에 짓눌린다.

자신의 멈추게 할 수 없는 눈물과 북받치는 슬픔을
아들이 본다면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스런 아들의 가슴에
보다 고통스런 슬픔의 예리한 못까지 박는
원인을 제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어머니는
슬픔으로 무너지는 마음을 마음대로 드러낼 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너무나도 복합적인 슬픔에 함몰된다.

그런데 그 슬픔은 '다 이뤘다'는 반전의 언설로 종결된다.

십자가는 인간의 본성적인 비참,
그러나 스스로는 그 심각성을 잘 모르는 비참의
잠재적 극치를 보여주되 바로 그 문제의 해법으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비참의 궁극적인 회복이다.
걸러 읽어야 할 중세의 신학적 미숙도 드물게 만났지만
보나벤처 통해 나 자신의 본질상과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했다.

이는 절기의 이벤트성 진리와 은혜가 아니기에
바울은 일평생 십자가만 알고 자랑할 것이라고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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