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9일 금요일

죄책과 수치

일본에서 태어나 수십년간 아버지를 뒤이어 선교사로 섬기신 어떤 목사님과 베이커 서점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목사님: 오호호...폴, 오랜 만이다. 잘 지내고 있어?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네.

나: 네, 잘 지냅니다. 목사님도 잘 지내시죠? 전 가족들과 공짜영화 보러 왔습니다. 흐흐흐

목사님: 나도 가족들과 왔는데, 멀리서 사역하는 아들이 왔거든.

나: 오랜만에 상봉하신 거겠네요. 목사님은 요즘 어떻게 뭐 하며 지내세요?

목사님: 난 요즘 지나간 생의 의미있는 정리를 위해 붓을 들었지. 일본의 선교역사 정리하고 있어.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바라보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관점의 차이를 조명하고 조화를 시도하는 글을 구상하고 있단다.

나: 첫번째 기획은 정말 유의미할 것 같고, 두번째는 대단히 흥미로운 주젠대요? 복음에 대한 동서양의 접근법이 많이 다른가요? 동양의 성장배경 가지신 서구인인 목사님께 딱 어울리는 주제네요? 하하하

목사님: 하하하 그런가. 동서의 차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죄책(guilt)과 수치(shame)의 차이라고 할까? 서구는 인간의 죄를 죄책과 늘 결부시켜. 서구 기독교의 궤적을 쭈욱 돌아보면 한번도 포기된 적이 없었던 전통적인 죄진술 방식이지. 그렇게 보면 신학에 법률적, 제도적 성격이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어. 어떤 질서 속에서의 잘못을 인지하고 수습하는 법적인 문맥이 강조되면 나의 내면을 향하여 깊이 박힌 죄문제의 실체는 간과될 가능성이 높아지지. 그런데 내가 태어나서 자라온 동양은 부끄러움 혹은 수치심에 민감한 문화적 신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나: 저도 역사신학 전공자로 역사의 먼지를 터는 방식으로 서구의 신학을 공부해 왔지만 서구의 신학은 주로 전자의 테마로 신학을 전개하는 것 같습니다. 부끄러움 혹은 수치의 개념은 조명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목사님: 맞아. 나도 서구의 신학이 외부의 어떤 질서에 위배되는 인간의 죄문제에 집중하고 정작 인간 자신의 내면으로 붉어진 죄의 영향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한 것을 느꼈단다. 성경은 안그런 것 같은데 말이야.

나: 정말 그러네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 그들은 '중죄를 지었으니 이제 죽었다'는 생각보다 눈이 밝아져 서로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게 되었고 두려움이 이어졌고 수치를 수습하는 태도를 취했던 것 같아요. 이러한 아담의 실패는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친히 벌거벗은 수치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수치를 가려 주심으로 회복된 것이구요.

목사님: 폴, 바로 그거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으셨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셔야 마땅하신 분인데 모든 걸 스스로 훌훌 벗으시고 죄악의 두툼한 때에 쩌든 부끄러운 육신의 옷을 입으셨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단순히 법률적인 문맥 속에서의 사태수습 정도로 풀어가는 신학의 편향성이 문제란다. 물론 그런 접근법의 중요성을 존중해야 되겠지만 동양의 문화가 가진 수치에 대한 깊은 이해로 십자가의 문제를 조명하면, 음...폴 너의 설명처럼 수치의 문제는 성경을 관통하고 있기에 그 정도의 비중만큼 존중되지 않으면 안될 듯하구나.

나: 목사님, 그 책부터 쓰세요. 벌써부터 읽고싶어 지는걸요? 첫번째 독자가 되고싶을 정도로요...하하하...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보다 풍요롭게 할 기획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글을 통해 성경의 그늘진 진리가 더욱 환하게 드러나면 좋겠어요.

목사님: 격려해 주니 고맙구나. 잘 될지는 모르겠다. 암튼 가족들과 좋은 시간 보내렴. 나중에 또 보자~~~

나: 네, 안녕히 가세요. 좋은 교훈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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