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2일 월요일

약하다는 이유로 약자를 약탈하는 자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잠22:22)

사회적 본성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다. 약한 자가 탈취를 당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약해서다. 이게 세상이다. 부당하고 비겁하다. 그런 부당과 비겁의 향연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편만하다. 알아도 괘념치를 않는다. 사실 강한 자들도 발등에 떨어진 생존의 불 끄기가 급급하다. 재물이 쌓이고 권력이 커지면 안전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거든. 강해도 여전히 강한 무리들 사이의 거친 정글법칙 때문에 숨이 막히니까 탐욕의 촉수는 보다 만만한 먹잇감을 더듬는다. 당연히 약자가 밥이겠다.

물론 레위기19장 15절이 지적하고 있듯이 재판할 때에 가난을 이유로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는 말아야 하겠다. 부와 가난은 재판의 유효적 변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재판정은 공의를 세우는 곳이지 자비의 아지트는 아니잖아. 공의로운 법의 기틀을 세우고 부당하지 않게 집행하는 책무를 추궁할 수는 있겠다. 누구든지 범죄하면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충실히 이행되지 않으면 안되니까. 

그러나 가난한 자를 가난하기 때문에, 약한 자를 약하기 때문에 멸시하고 짓밟고 탈취하고 판결까지 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그들을 위해 주님께서 친히 신원의 입술을 여시고 그들을 노략하는 무리들의 생명을 제거하실 거라신다. 가난한 자들을 조롱하고 학대하는 자는 그들을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의 곁에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한다. 맞다. 역사 속에서 어느 사회에든 가난한 자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약자는 늘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인간의 항구적인 본성은 지칠 줄도 모른다는 반증이다. 고의성은 없었을지 몰라도 약자를 약하다고 멸시했던 적이 나에게도 있었다. 물론 나는 자신을 약자라고 늘 생각했다.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데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다는 말씀의 감시를 늘 받아왔다. 가난하고 약하다고 해서 가난한 자를 멸시하여 그를 지으신 창조주 멸시하는 일에 면제되는 것은 아니겠다. 

오늘은 종일토록 약자를 약하다는 이유로 약탈하는 본성 경계령을 발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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