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8일 일요일

죄의 대처법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28:13)

잠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자의 참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본문도 그러하다. '죄'라는 말은 인간의 문맥과 관계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의 실존이다. 죄를 숨기는 행위는 죄가 인간의 감시망만 피하면 괜찮다는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럴 의식이 없었어도 점차 그런 방향으로 중독된다. 결국 자신도 속이고 타인도 속이게 된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계시는 분을 안계시는 분처럼 대우한다.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 앞에서의 정직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죄의 숨고자 하는 은닉성에 철퇴를 가하는 담력의 소산이며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교살한 죄를 "내가 주께만 범죄"한 것이라고 한 다윗의 고백처럼 죄의 본질과 핵심을 간파한 자가 구사하는 지혜로운 정공법의 표준이다. 비록 사람들 앞에서는 비웃음과 멸시를 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긍휼과 자비를 취득하는 첩경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약점과 실수와 오류를 가리는 일에 민감하고 민첩하다. 인류의 조상이 물려준 항구적인 버릇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범한 이후 엄습한 수치와 공포에 대한 아담의 대처는 나뭇잎 치마로 수치를 가리고 나무 그늘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물이 마치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자신의 죄를 가릴 수단은 존재할 턱이 없었다. 자신의 기준을 따라 스스로 안심할 뿐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친히 덮으셨다. 죄문제의 해소는 사람의 몫이 아니었다. 죄는 주님의 무궁한 자비와 긍휼로만 소멸될 수 있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그걸 고백하는 다양한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늘 우선이다. 죄에 대한 대처는 고작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관리 수준이다. 내 의식이 무뎌지고 타인의 시선만 따돌리면 그만이라 여겨서다.

지혜자는 죄를 숨기는 자가 형통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진정한 형통은 사람들이 좌우하지 못해서다. 사람의 흥망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 인생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의 교차는 예측을 불허한다. 가까운 원인들이 산더미 수준으로 많을 것이다. 태양도 달도 바위도 정화수도 조상도 유력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장구한 문화와 전통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배려"라고 해명한다.

죄를 자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거룩과 주권과 긍휼과 자비를 찬양하는 행위이다. 실 한오라기 약점의 희미한 꼬투리만 잡혀도 형통의 목덜미가 잡히는 살벌한 사회에서 죄와 잘못은 할 수만 있다면 드러나지 않도록 가리기에 급급한 게 현실인 거 안다. 그러나 잠시 가리는 달콤함이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보다 엄중한 죄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사단의 떡밥일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렇다고 자신의 은밀한 죄를 동네방네 광고하고 다니라는 말은 아니다. 죄의 본질과 대처의 핵심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허물의 사함과 죄의 가리움을 받는 복의 지극함 때문에 사람들에 대해서는 만물의 찌끼가 되더라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이 자유로운 그런 삶의 태도를 의도했을 뿐이다.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떳떳한 삶이 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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