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2일 월요일

이성과 계시의 조화

토마스는 사물에 대한 자신의 정의에 사물 자체가 일치할 것이라고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

신학의 철학화 문제, 철학의 신학화 문제...토마스의 해법: 철학적인 문제는 철학자 신분으로, 신학적인 문제는 신학자 신분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신앙은 지성의 동의를 포함한다. 신앙적 활동은 합리적인 증거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간섭을 포함한다. 과학적인 지식에 있어서 나의 수긍이나 승인은 충분하고 완전하게 바로 그 대상에 의해서 결정된다. 동일한 사물이 동일한 시간에 과학의 대상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인 경우는 없다.

"신앙을 가진 사물을 증명하기 위해 성스러운 사람들이 사용한 이성은 증명이 아니다. 이성은 증명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증명하려 했던 것이 실제로 증명이 되었다면 그것은 과학적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토마스가 소개한 신앙과 합리적인 지식 간의 특수한 구분은 그 자신이 어떤 분리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아베로적 대립으로 보지도 않았다. 자기들의 결론을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하기에 합당하다 여겼던 철학 교수들에 대해 토마스는 그들의 입장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반대했다. 신학자의 필연적인 추리는 단순한 변증법적 개연성일 뿐이라는 아베로의 견해에 동의했다. 신학자는 어떤 사람을 확신시킬 때에 자기가 증명하려 제시한 것을 믿지 않는 한 결코 확신시킬 수 없다.

토마스는 아베로가 오류를 지니지 않은 아리스토 해설가로 보지 않았으며 아리스토 자신을 무오류한 철학자로 여기지도 않았다. 아리스토가 옳을 경우에만 그를 따랐다.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과 같은 신앙의 조항들을 만약 이성이 참다운 것이라고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 조항들이 그릇된 것이라고 입증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신앙은 실로 철학적 지신의 원리가 아니라 합리적 진리에 대한 안전한 지침이며 철학적 오류에 대하여 잘못을 범할 수 없는 경고이다.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 믿을 수 있는 것을 결코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 신앙과 지식 양자가 동일하게 신성한 원천에서 흘러나온 것이기에 그의 신앙과 지식이 유기적인 통일로 성장하는 그런 사람은 토미즘의 추종자다.

질송은 그런 인물들로 카제탄과 마리뗑을 거론한다.

스코투스: De primo principio에서 하나님의 전능, 무한, 편재, 섭리,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용서는 믿음의 대상이며 합리적인 논증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들이다. Theoremata에서 논증 불가능한 명제들 중 신의 단일성, 무에서의 세계 창조, 세계를 창조한 신에 의한 세계의 현재적인 보존 등도 증명 불가능한 목록에 들어간다. 그러나 신학에서 충분히 합리적 필연적 논증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들이다. 믿음을 전제한 증명이다.

오캄: 자연적인 이성의 빛으로는 신에 관하여 신의 존재에 관하여 전적으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성이 신학적인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변증법적 개연성의 범주를 넘어가지 못한다. 오캄의 영향으로 중세는 이성과 계시의 결별로 치달았다.

존 게르송: 게르송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원하였던 것은 실천적인 기독교적 삶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변적인 신학도 무용했고 신비적 합일에 관한 애매하고 불안정한 신비에 스스로를 맡기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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