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3일 화요일

플라시의 중세철학 이야기

중세의 책: 1) 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었다; 2) 수도원과 성당을 포함하여 도서관을 소유한 사람은 법적으로 어떤 특정한 성인이라 여겨졌다; 3) 800년경의 책은 황제의 소유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정신적,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를 교육하던 수도원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황제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옥타비움: 손을 대지 않은 자연에 위용과 질서를 부여하는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있었다. 형식과 통일성과 구심점이 거기에 있었다. 신비한 어둠 속에서도 모든 구별은 흐려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황제는 "위에" 있었고 성직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밑에" 있었다. 위계질서, 통치력, 폭력이나 전쟁이 없이는 성취되지 않을 것이었다. 칼 대제의 손에는 언제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설정(Einsetzung)"은 카롤링거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황금으로 칠한 십자가는 고대의 보석이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성정은 과거에 있었던 것을 현재로 가져오는 것이다. 카롤링거 왕조와 오토 왕조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통을 공감할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배하는 세계에의 참여를 의도한 것이었다. 아름답고 뛰어난 것들은 모두 천상의 세계 지배자와 그 지배자의 세속적 재현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였겼기에 보석이 십자가 설정의 중심부에 있었던 것이다.

서유럽 문화의 토대를 마련한 칼 대제는 글을 모르는 왕이었다. 그러나 왕의 진정한 소양에 해당하는 문명의 빈곤을 해소해 줄 조력자 선발에는 탁월한 안목을 가졌었다. 781년 로마 원정길에 영국 요크의 신학자 알퀸(Alcuin, d.804)을 알고 자신의 교육정책 및 교회정책 중심부에 심었다. 알퀸을 왕실학교 교장으로 임명하고 문화정책 책임자로 위촉하고 차세대 지도자를 양성하게 했다. 알퀸은 고대로마 및 교부들의 문헌을 연구했다.

De fide sanctae trinitatis 서문에서 알퀸은 철학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중세에는 철학적 탐구들이 문법서, 의학서, 신학서에 자주 등장했다. 서문에서 알퀸은 황제만이 "백성의 책임자요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는(populo praeesse et prodesse)" 의무를 가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권력(potestas)과 지혜(sapientia)는 황제의 몫이었다. 권력은 교만한 자를 누르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혜는 예속된 자들을 충실히 보살피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황제가 권력과 지혜로 무장되는 것은 신의 일이었다. 황제는 옳은 말을 해야 하고, 지시를 내려야 하고 종교적 삶을 보존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받아 본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De fide는 알퀸이 황제에게 이러한 보편적 신앙의 선포(praedicatio catholicae fidei)를 예비하기 위해 기독교 교리를 소책자 형식으로 요약한 책이었다. 여기서 알퀸은 황제보다 더 위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 백성의 제후는 모든 것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연히 황제보다 더 중요하고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의 지식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알퀸은 황제의 지식을 보완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었다. 알퀸은 황제가 기독교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을 알거나 충분히 연구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황제는 수도자적 봉사의 의무와 보편적 신앙에 대한 완전한 지식(perfecta in catholica fidei scientia)를 가지고 있다. 이를 펴뜨려 인류를 살려내고 성화를 시킨 보편적 신앙은 성스러운 평화와 완전한 사랑의 일치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De fide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루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설명하며 지복이신 하나님의 평화에 대한 전망으로 내용을 끝맺는다. 그런 전망에 합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평화 속에서 온전하고 확실한 안전과 영원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plena certaque securitas et sempiterna felicitas). 거기서는 덕이신 하나님이 덕에 대한 보상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 보상이며 그러한 하나님 이상으로 선하고 위대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quo melius et maius nihil possit esse). 하나님 자신을 보상으로 받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온전하게 가질 것이다. 그제서야 모든 재난도 사라지고 죽음도 극복하게 된다. 모든 사람을 위한 유일한 사랑, 모든 사람과의 유일한 일치만이 있을 것이며 주님의 집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철학은 가톨릭 신앙을 설명하고 설정하는 것을 돕는다. 철학은 변증학 혹은 논리학과 동의어다.

알퀸의 헬라어 실력은 변변치 못하였다. 그러나 존중했다. 궁정 학문은 비잔틴 문화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도 그리스의 유산이 있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적인 서술의 10가지 종류(decem genera humanae locutionis)를 범주로 잡았다. 이는 인간적인 서술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규정이다. 서술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 우리의 서술이 가지고 있는 근거요 원인이다. 사람들, 각각은 인격(persona)이고 모두 하나의 동일한 실체(substantia)라고 했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인간이란 단어가 다른 여러 인격들의 실체를 칭한다는 것을 더 이상 당연하게 보지 않게 되었다. 인간의 언어가 범주에 의해 규정되어 있듯이 성경의 서술도 그렇다고 보았다. 변증론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어떻게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는가 하는 규칙을 가르쳐 준다. 아브라함의 실체는 무엇ㅇ니가 물으면, '인간'이라 대답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관계의 규칙'은 하나님이 '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일 것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알퀸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중세 최초의 전체적인 설명을 실현했다. 왜 이것이나 저것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답변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이 허위이고 진리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변증론 없이는 이러한 확증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알퀸의 범주론은 원시적인 것을 제거했다. 하나님은 선이라고 불린다. 하나님 안에 있는 선은 속성도 아니고 자기본질 혹은 실체에 더불어 있는 '우연(accidens)'이 아니다. 신 안에는 어떠한 우연적인 것도 없다. 이는 신 안에는 어떠한 변천이나 시간도 주어져 있지 않지만 속성에서 나오는 것은 변천하며 시간 속에서 진행하기 때문이다. 신의 불변성과 세계의 가변성은 알퀸이 전통에서 부활시킨 중요한 철학적 모티브다.

고대와 기원전의 철학에서 관계는 우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Aug는 이것을 바꾸었다. 신에 대해서는 '본질'의 범주뿐만 아니라 '관계'의 범주도 언급될 수 있다. 신은 순수하고 침해받지 않는 존재이며 신은 '존재 그 자체'시다. 신 안에서는 관계적인 것이 바로 그의 본질 자체시다. 알퀸은 이러한 개혁적인 Aug 범주론을 중세에 정립했다. 알퀸이 중세에 제공한 것은 전통 그대로다.

알퀸은 "관계"와 "실체"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신 안에는 우연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되었다. 신은 무시간적 비공간적 방식으로 사유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이와 다르게 말한다면 그런 문장들을 변증론의 규칙에 따라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변증론은 그에게 해석의 지침이다. 성경의 어떤 문장은 "상징적 의미"로, 어떤 문장은 "본래적 의미"로, 어떤 문장은 "전이된 의미"로, 어떤 문장은 "관계적 의미"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다.

알퀸의 책은 전쟁 후기의 작품이다. 전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황제와 신하에게 미래를 위한 어떤 교시를 제공해야 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할 수 있었던 인물은 알퀸 뿐이었다. 교황과 주교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칼 대제가 가장 높은 정신적, 종교적, 세속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란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에 전쟁과 유배의 잔인성 뒤에 대두되는 카롤링거 왕조의 권력 및 문화의 구조가 가지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 과제였다. 알퀸은 그 의미를 일치 속에서, 인간적 실체의 평화 속에서, 그리고 불안정한 세계에 어떤 형식을 부여해야 할 신의 지도권이 세상에 드러나는 예증 속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 형식은 인간의 보편성과 기독교적 당위성을 가진 현실적인 조직이어야 했고, 그 당위성은 고대 문화의 또다른 보물처럼 철학을 새로운 역사적 세계에 설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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