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9일 월요일

종교개혁 이후

종교개혁 주간이다. 늘 그렇듯이 기념의 무게는 주로 16세기 초반에 50년간 벌어진 기독교의 전방위적 쇄신과 변혁 이야기에 실린다. 지금은 연구의 폭이 넓어져서 루터(비텐베르크)와 칼빈(제네바)과 틴데일(옥스포드)만 주목하던 과거와는 달리 오클람파디우스(바젤), 카피토(스트라스버그), 쯔빙글리(쮜리히), 멜랑히톤(비텐베르크), 버미글리(스트라스버그, 옥스포드, 쮜리히), 부쩌(스트라스버그), 불링거(쮜리히), 낙스(스코틀랜드), 삐레(로잔), 무스쿨루스(베른), 파렐(프랑스), 데타플(빠리), 히페리우스(마르부르크) 등의 이름도 거명되고 그들의 공적에 대해서도 전문적인 소개가 이어지고 있다. 긍정적인 현상이다. 한국교회 현실이 필요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로 150년간 격정적인 종교개혁 정신의 고백화와 체계화와 제도화와 조직화와 교육화와 문화화에 대한 관심의 빈곤을 지적하는 분위기는 아직 감지되지 않는다. 종교개혁 이후 인물들은 몇몇 거성들의 심장에서 강력하게 박동했던 개혁의 정신을 당시 열악한 치안과 의료시설 속에서 언제 직면할지 모르는 그들의 죽음과 더불어 무덤에 묻어버릴 수만은 없었다. 당연히 보다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의 심장으로 번져 교회의 전반적인 체질 속으로 안착될 필요성은 절박했다. 그들은 그걸 수행했다. 하여 종교개혁 당시의 역사에 돌려지는 관심과 동일한, 어쩌면 그 이상의 관심을 쏟고 발굴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할 분야가 바로 종교개혁 이후의 정통주의 시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먼저 개혁적인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 발전소가 바젤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에 세워졌고 기존의 로마 카톨릭 성향의 대학들도 개혁의 산실로 변해갔다. 시골과 도시를 불문하고 로마 카톨릭의 행위 중심적인 구원론과 교황을 필두로 한 위계질서 의존적인 교회의 제도들과 출생에서 사망까지 한 사람의 일대기에 성례전적 올가미를 씌워 일상마저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의 기독교 문화 속에서 신학과 목회의 뼈가 굳고 길들여진 목회자 사회의 개혁을 위해 앞에서 몇 명만이 깃발을 흔들고 열정을 불태우는 것으로는 비록 필수적인 것인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몇몇 도시에 프로테스탄트 대학이 세워져 개혁의 정신이 목회자 개인에게 직접 수혈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종교개혁 정신의 계승, 유지, 발전은 그곳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16세기 후반에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고 안착하고 발전시킨 정통주의 작업에 두각을 드러낸 당시 종교개혁 3세대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잔키우스(스트라스버그, 하이델베르그), 베자(제네바), 우르시누스(하이델베르그), 카트라이트(캠브리지, 윗기프트 등극으로 교수직을 박탈), 올레비아누스(하이델베르그), 유니우스(레이든), 퍼킨스(캠브리지), 케커만(단찌히), 그리네우스(바젤), 폴라누스(바젤) 등이다. 그들이 섬기는 도시와 교구의 색바랜 종교적 칼라는 서서히 개혁의 푸른 물감으로 채색되어 갔다. 종교개혁 정신은 단순히 교회의 변화만이 아니라 학문과 법정과 산업과 가정의 변화까지 수반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학문의 통일성은 35개 이상의 분야를 성경에 기초하여 통합한 케커만과 알스테드 손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후로도 17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인물들은 고마루스(레이든), 알스테드(헤르보른), 왈레우스(레이든), 폴리얀더(레이든), 마코비우스(프라네커), 에임즈(프라네커), 루베르투스(프라네커) 등이 있으며, 17세기 말엽까지 개혁의 촛대를 붙들었던 마레시우스(흐로닝엔), 푸치우스(우트레히트), 차르녹(옥스포드, 더블린), 오웬(옥스포드), 튜레틴(바젤) 등이며 그 이후 18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마스트리히트(우트레히트), 윗시우스(프라네커, 우트레히트, 레이든), 아 브라켈(노틀담), 픽테트(제네바), 말키우스(레이든), 레이데커(우트레히트), 보스턴(스코틀랜드) 등이 정통주의 시대를 종결하는 인물들에 해당된다.

시간의 길이로 보나 인물의 분포도로 보나 지금 우리가 종교개혁 시대를 기념하는 것은 종교개혁 전체의 1/4 조각에 불과하다. 그 조각만의 가치와 교훈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전부로 여긴다면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가 없었어도 개혁이 성공했을 거라고 간주하는 것과 일반이다. 지금 우리가 종교개혁 유산을 네 개의 조각 중 하나라도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정통주의 시대에 이루어진 종교개혁 신학의 체계화, 조직화, 고백화, 제도화, 교육화, 문화화에 쏟은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의 땀방울이 맺은 결실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종교개혁 시대의 뜨거운 열정을 전수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 개혁된 진리의 내용이 의식과 문화와 관습 전반에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어짐에 있어서는 다소 취약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종교개혁 이후의 정통주의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라 하겠다.

이제는 그 작업에 뛰어들 젊은 피가 시간을 길게 두고 해산의 고통을 시작해야 할 때인 듯하다. 물론 앞서 훌륭한 선배들이 긴 안목으로 남긴 업적과 이정표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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