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6일 토요일

믿음을 생각한다

에베소서 2장 8절-10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행위와 은혜와 믿음과 구원이란 낱말들이 등장하여 의미를 구성하고 있는 대목이다. 시간의 현장에서 발견되는 구원의 가까운 원인은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믿는 행위, 영접하는 행위, 그래서 구원을 받는다는 확언으로 이어진다. 비록 우리의 눈에 펼쳐진 가시적인 사태의 전개는 행위와 구원이 인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은혜와 믿음을 쌍으로 묶어서 구원의 원인이라 하였고 이를 간단히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믿음을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믿음은 눈앞의 실상이나 가시적인 것들과 관계하지 않는다. 믿음이 없어도 그것들을 보고 듣고 확인하는 일은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희생되는 것들이 있다. 즉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다. 소망하는 것들의 실상도 당연히 상실된다. 믿음의 문제는 가시적인 것으로 해석되는 개념이 아니다. 믿음으로 믿음을 해석해야 할 것을 요청하는 사안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믿음의 유무가 어떤 외부의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의 출처는 어디인가? 믿음은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내 안에서 지식과 동의와 의존이 발생하는 것인데, 이는 어떤 대상에 대해 나의 성정 혹은 본성에 빗대어 합치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나의 본성이 죄로 얼룩져 ‘죄성’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면, 믿음은 그 죄악된 본성에 합치되는 차원에서 발동하게 된다.

과연 우리가 죄악된 본성을 가졌다면 성경이 말하는 그런 대상을 향한 믿음과 합치되는 것이 있겠는가? 죽어 있는 자에게는 생명과 합치되는 그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다. 죽음이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든 기능의 정지를 의미하든, 성경이 말하는 의미의 믿음은 죄인인 나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고 다른 어떤 피조물이 우리 안에 믿음을 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출처는 하나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믿음은 창조의 신비처럼 그 근원이 인간문맥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성경은 믿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란 차원에서 ‘믿음’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믿음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것이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과 자비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응축되어 있는 하나님 자신과 행하신 모든 것들이란 뚜렷한 대상을 향한 믿음을 성경은 ‘믿음’이라 칭한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말...죄가 원인이 되어 우리에게 생명의 어떤 씨앗이나 기운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죽었다’는 말에서 기존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는 혹은 지금은 기능의 마비가 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결론은 인간이 생명과 관계된 사안에서 원인으로 간섭할 수 없다는 말이다.

믿음은 참으로 신비롭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 아브라함 경우에도 그렇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셨다. 성경의 정확한 진술이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할 경우, 마치 자기가 주고 그 주어진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하신다면 혼자서 북치고 장구친 것처럼 보여 자기모순 어법으로 읽혀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가 의로움의 근거로 주장할 어떤 인간의 행위로 간주될 수 없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의롭다고 하시는 그 놀라운 사건을 인식하는 최소한의 기능적 장치이다. 믿으니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에서도 우리의 행위적 공로를 챙기려는 순발력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못말리는 인간의 죄성을 반증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믿음은 기적이다. 눈에 보이고 우리의 의식에 가까운 인과율에 곧장 결부시켜 논할 사안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의 신비는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분량만큼 믿음의 비밀을 알고 그만큼의 믿음에 이르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그까지의 장성한 분량의 믿음에 이르는 게 성도의 삶이기도 하다. 교회가 그렇다. 

사실 믿음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행위라는 원인의 결과도 아니라는 바울의 말이 에베소 성도들의 기세를 꺾으려는 야속하고 고압적인 어투로 읽힐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믿음이, 구원이 인간에게 근원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나의 생각과 나의 판단과 나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기에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영원한 결과의 원인을 내가 제공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두렵고 불안한 일은 없을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그런 마음의 일거수 일투족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좌지우지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악몽이다. 이는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그림자가 없으신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그렇게도 큰 은혜와 위로가 되는 이유다.

본문에서 나는 '믿음과 의로움과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와 자랑을 내세우면 죽어'라며 에베소 성도들을 겁박하는 바울의 주먹이 보이지 않고 고도로 구사되고 있는 그의 은혜로운 어법을 목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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