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2일 금요일

사랑과 부수적인 것들

Church of the Servant에 제3세계 이민들을 위해 드려지는 쉬운영어 예배(BES)가 있다. 가족들과 함께 그곳에 참석하고 있다. 오늘은 메시지에 큰 도전을 받았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존재도 의심했던 '목회자'의 자녀였다. 그런데 어떤 선생님을 만나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게 되었단다. 이유는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와 교통을 고려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 사랑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고 말았단다. 도대체 그는 어떠한 차원과 분량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고백에 눈물까지 머금어야 했을까? 진리는 사랑을 따라 구하는 것이며 사랑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압도했던 예배였다. 공부 열심히 하고 많은 정보를 취득하고 탁월한 언변을 구사하는 전달력은 진리 전달의 대단히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질적인 수단은 십자가로 증거된 하나님 사랑의 완전함을 따라 진리를 공부하고 익히고 전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은 (삼일천하 될 수도 있겠지만ㅡ.ㅡ) 그런 다짐을 해버렸다. 사중적인 인과율 안에 목적인도 있다. 사랑을 목적으로 지향하지 않는 지식이 얼마나 온전할까 생각해 보았다. 사랑이란 지향점이 생략된 지식추구 방향성은 뻔하다. 지식은 교만케 한다는 말씀이 잘 가르치듯, 교만이란 동기와 목적이 그 공백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어거스틴 해석학의 핵심은 성경의 어떤 구절을 풀이할 때에도 그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귀결되지 않는 해석은 불완전한 것이며 결국 오해와 왜곡을 빚는다는 것이다.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여러 논문을 한편씩 읽고 책을 한권씩 독파하며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동기의 순수성 보존과의 낯선 싸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외면하지 말아야 할 도전이다. 어쩌면 고급정보 취득보다 더 지난한 싸움일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든다. 너무 당연한 건데 가끔 까먹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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