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0일 수요일

역설적인 증인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이어서 예수님은 '본다고 하니 저희 죄가 그저 있다'고 하셨다. 뚱딴지 같은 동문서답 어법이다. 보고 듣는 지각에서 가치를 경험하고 축적하며 문명을 이룩하는 인간에게 예수님의 '본다'와 '죄'의 동일시는 억울함을 넘어 '배째라' 냉소까지 자아낼 수 있겠다. 이는 인간의 생겨먹은 근본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다'는 행위는 빛의 협조를 필히 요구한다. 빛과 시간이 같다는 사실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가지는 치명적인 한계는 시간의 개입 없이는 이해의 문턱에 한 발짝도 들어서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시간으로 번역되지 않으면 이해도 납득도 불가능한 게 전두엽 안에 꼬여 있는 인간 이성의 실상이다. 시간의 흐름을 근거로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인과의 문법을 가지고 사물과 사태를 해석하는 인간에게 시간의 형식을 상대적인 것으로 돌리고 심하게는 제거할 수도 있는 영원 개념은 폭행에 가까울 수 있겠다.

세상의 창조에 대한 인간의 이해도 역시 시간에 근거한다.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원인과 결과라는 시간적인 인지의 다발로 엮어주지 않으면 말씀의 명령으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는 멀쩡한 시각의 소유자로 소경되게 하는 사안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역설들로 충만하다. 영원하신 주님께서 주어로 계셔서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않으면서 성경을 벗기고 세상을 주석하는 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시도인가!

그래서 증인의 방식이 요구된다. 성도의 삶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성경의 해석이요 진리의 번역이 되어야 한다는 방식 말이다. 이 시간의 세상이 아니라 저 영원의 세상을 근거로 살아가는 성도의 역설적인 삶은 소경의 눈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다. 그게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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