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2일 금요일

예수 그리스도 생각하며

오병이어 기적은 자연의 질서를 재해석할 단서를 제공한다.

자연에는 자연의 법이 있고 그 법은 인류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높은 차원의 질서로 진입하는 디딤돌에 불과하다. 하여 '여기가 좋사오니' 같은 태도로 자연에 안주하는 것은 금물이다. 물론 두 질서 사이에 배타적인 분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연의 가시적인 질서를 궁극으로 여기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보고 임금 삼으려고 했다. 척박한 광야에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모세의 맛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타고 이어지는 회복의 주린 목구멍을 언젠가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 기름진 것으로 만족시킬 기대감이 소멸되지 않게 하는 결코 망각할 수 없는 추억이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을 목격한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그들의 심정이 이해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응은 차갑고 헛갈린다. 아득한 소망이 눈 앞의 현실로 펼쳐질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는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란 송곳처럼 의표를 찌르는 지적에 정이 뚝 떨어진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권면으로 국권과 민족성의 상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그들을 지탱해 준 회복의 숭고한 열망을 '썩는 양식'일 뿐이라며 다된 밥상에 재까지 뿌리신다. 맛나에 대한 그들의 아름다운 기억에도 재해석의 날을 세우셨다.

그건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의 비유일 뿐이란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인데'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다. 조상들은 '맛나를 먹었어도 죽었지만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며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생명이요 영이라'고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대감이 변하여 적개심의 화신으로 변한다. 결국 그들이 기억하고 기대하던 왕국상에 치명적인 흠집을 가한 예수님을 불법의 대명사가 매달리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기대하던 왕국과 주님께서 말씀하고 가르치신 '하나님의 왕국'은 너무나도 판이하여 두 중의 하나가 제거되지 않으면 안되는 형국으로 치달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길을 꺾지 않았고 주님도 주님께서 만세 전부터 의도하신 하나님의 왕국을 '다 이루셨다.' 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썩어 없어지는 양식 조달의 수단으로 여기지는 않는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은 내가 가진 야망의 투사일 지도 모르겠다. 말씀에 전무하는 이유가 떡먹고 배부른 까닭에 움직이는 자들이 신주처럼 받드는 현세적인 욕망에 비위를 맞추고 그것을 을 이용하고 조종하여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려는 모리배의 행보는 아닌지를 놀란 가슴으로 돌아보게 된다.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자연적인 질서를 따라 예수님을 이해하고 다수의 동의를 확보하는 넓은 대로행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질서가 마치 비유처럼 들러리로 서서 기념하고 있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좁고 협착한 그러나 보다 높은 차원의 질서를 따른다.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영적 질서의 비유였다. 썩어 없어지고 먹어도 다시 주려 죽게 되는 맛나가 아니라 영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이 제공하는 질서에 부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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