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2일 금요일

톰 라이트의 Surprised by Hope

하늘과 부활과 교회의 사명을 논한 책이다. 하늘과 부활과 지옥에 대한 라이트의 개념에 동의가 안되는 부분이 꽤 있다. 죽은 자들과 더불어 기도하는 개념도 그렇다. 그러나 이틀동안 마치 1급 경건서적 읽는 즐거움에 포박된 듯한 시간을 보냈다. 무진장 재미있다. 많이 배운다. 흥분한다. 기분도 좋아진다.

잠잠하고 미지근한 개인과 교회로 하여금 주먹을 불끈 쥐고 무언가를 향해 질주하게 만드는 각성제와 같은 역할도 톡톡히 한다. 라이트의 해박과 학자적 성실함과 대중적인 전달력 및 설득력이 강하게 반영된 책이다. 게다가 그는 수사학의 달인이다. 인상에 남는 것들만 몇 자 적으련다. 그렇다고 꼴랑 한권을 읽고 ‘비평’이란 진중한 단어를 갖다붙일 필요는 없겠다. 그럴 자격도 안되잖아.

책제목이 ‘Surprised by Hope’인데 라이트가 놀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일독하며 그가 말하는 ‘소망으로 인해 놀라지’는 않았다. 비록 라이트는 부활의 소망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현대의 서구 교회들이 수세기에 걸쳐 간과하고 묵살했던 것이라고 줄기차게 말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카이퍼의 일반은총 교리의 성경신학 버전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별히 교회의 사명 부분에서. 그러니 생소하지 않았고 놀라지도 않을 수밖에. 접근법과 어조가 달라서 오히려 유쾌했다. 게다가 카이퍼의 언사보다 더 매끄럽고 ‘선동적인’ 필력을 과시하는 듯해 독서의 즐거움은 날개를 달았었다.

최소한 이 책에서 라이트가 말하는 자신의 신학 방법론은 이렇다. 먼저 그는 영국 국교회가 교리를 산출하는 방식이 성경과 전통과 이성 및 이것들의 종합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27). 그러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현대적 해석들은 이것들 중에 어느 것 하나에도 의존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족보도 불투명한 유사 기독교적 문화에 출처를 둔 것이라고 일갈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해석들은 성경과 1세기의 유대적인 문화 탐구를 통해 교정을 받아야 한단다. 실제로 라이트는 자신의 책 전반에서 성경과 전통을 충실히 살폈으며 교부들과 중세 학자들과 종교개혁 인물들도 소수 언급하는 시대별 안배에도 신중을 기하였다. 성경의 단어들을 1세기 전후의 유대인이 가졌던 생각에 무게를 두고 주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별히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고대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점 모두를 참조한다(35).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 어떤 독보적인 성격을 부여할 때에는 '예전에 한번도 주장되지 않았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킬 때에는 수용할 수 없는 (그렇다고 얼토당토 않지는 않은) 두 극단을 제시한 이후에 본인의 입장을 꺼내는 경향을 보인다. (나도 이런 어법을 자주 구사한다.)

여기서는 독자가 누구냐가 중요한데, 라이트는 이 책의 독자가 누군지에 대해 특정한 대상을 밝히지 않았다. 비록 서문에서 미국과 영국과 호주에서 한 강연들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지만 대체로 막연하다. 그냥 기독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정도로만 이해해도 되겠다. 고대에 ‘부활’을 의미하는 헬라어와 라틴어와 다른 언어들은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대교와 기독교 외에는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얘기다. 초기 성도들이 생각한 부활의 의미, 즉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신 것’의 의미는 예수의 영혼이 천상적인 복으로의 진입도 아니고 그가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부활은 철저하게 물리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완전하게 물리적으로(physically) 살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66). 라이트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과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것’을 동일한 실체의 다른 표상일 뿐이라고 한다(109).

여기서 하늘은 땅과 찰라적인 관계성을 가진 것으로서 하늘에 거한다는 것은 땅의 특정한 곳에 계시면서 동시에 땅의 모든 곳에 계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승천은 그가 어디서든 접근이 가능하고 준비되어 계시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를 찾고자 땅의 어떤 특정한 곳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111). 나아가 라이트는 ‘하나님이 전 우주를 구속하실(redeem) 것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마지막 궁극적인 구속은 하늘과 땅이 연합하는 때에 이루어질 것이란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사용되는παρουσία 의 문자적 의미는 오신다(coming)는 게 아니라 부재(absence)와 반대되는 ‘현존(presence)’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παρουσία는 이방에서 ‘신의 신비로운 임재 혹은 초자연적 힘의 나타남’을 표상할 때에 사용되고 왕이나 황제가 식민지나 지역을 순시할 때에 사용된다(129).

라이트는 이런 의미가 재림의 기독교적 이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바울은 이 용어를 시저는 진정한 왕의 페러디일 뿐이고 예수님이 실체라는 정치적인 신학을 펼치는 차원에서 썼다고 라이트는 이해했다. 즉 예수님이 몸으로 계실 때에는 유대땅에 제한되어 계셨지만 부활 이후에는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모든 곳에 거하시며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설파하기 위해 바울이 παρουσία 단어를 썼다는 얘기다. 요한일서 2장 28절과 3장 2절은παρουσία와 ‘나타남’이 나란히 등장하고 있는데, 라이트는 여기에서 ‘나타남’이 어떤 면에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처럼 우리에게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지금 ‘현존’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나타내 보인다’는 바울의 논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이해한다(135).

140페이지에는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행위에 따른 미래의 심판 사이에는 어떠한 충돌도 없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이에 라이트는 이 두 가지가 서로 의존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말한다. 칭의에 대해서는 우병훈 목사의 ‘칭의를 말한다’의 서평을 참조하면 되겠다. 라이트가 이 책에서는 말을 아꼈거든. 라이트는 사람들이 사후에 원스텝(one-step) 방식으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입장이 기독교적 소망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뒤튼다고 생각한다(148). 그러면서 ‘사후의 삶(life after death)’이 있고 ‘사후의 삶 이후의 삶(life after life after death)’이 있다고 주장한다(151). ‘사후의 삶’에 대하여 라이트는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거할 곳(dwelling place, μοναί)’이 고대 헬라어의 용례에 따르면 ‘종국적인 안식처(last resting place)’가 아니라 장기적인 여정에서 잠시 머무는 ‘일시적인 정거장(temporary halt)’ 정도라고 주석한다.

예수님이 도둑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 한 낙원과 ‘내 소망은 몸을 떠나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한 장소도 일시적인 것이란다. 바빙크의 을 보면 성도에게 죽음 이후 부활 이전에 중간적인 상태(intermediate state)가 있다는 개혁주의 입장(동방 정교회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을 잘 소개하고 있다. 라이트가 생각하는 부활은 그런 ‘사후의 삶’이 아니라 ‘사후의 삶 이후의 삶’으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변형되고 영광스런 몸과 같은 '몸의 살아남'을 의미한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15장 44절을 언급하며 육신적인(ψυχικός) 몸과 영적인(πνευματικός) 몸의 대조를 설명한다. 여기서 라이트는 접미사 -ικός를 ‘어떤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이나 에너지’로 보고 ‘육신적인 몸’은 ‘일반적인 인간의 영혼(ψυχή)에 의해 활동하는 몸’을 말하고 ‘영적인 몸’은 ‘하나님의 영(πνεῦμα)으로 이끌림을 받는 몸’이라고 해석한다(155-56). 즉 바울의 본문은 물리와 비물리의 대조가 아니라 부폐할 수밖에 없는 물리성(corruptible physicality)과 부폐할 수 없는 물리성(incorruptible physicality)을 대조시킨 것이라고 한다. 부활, 즉 사후의 삶 이후의 삶은 하늘과 땅이 입맞추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구속과 회복이 성취되는 종말에 바로 그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이끄림을 받는 몸으로 사는 삶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라이트는 지금 살아가는 이 땅과 새 땅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지금 우리가 가진 몸과 장차 가지게 될 영적인 몸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라이트는 지옥(γέενν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것의 본래적인 의미는 어떤 이념이 아니고 고대 예루살렘 바깥에 있는 한 장소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on earth)의 문제로 이해하듯, 지옥도 사후에 가는 어떤 영원한 불못이 아니라 지상(on earth)의 문제로 이해한다(176).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는 현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정의와 자비를 교훈하기 위한 비유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이해에 기초하여 라이트는 말을 아끼면서 최후의 심판을 논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경고를 계속해서 무시한 자들은 자신들의 유효적인 선택(effective choice)으로 말미암아 한 때 인간으로 있었으나 사후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로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대신한다(182).

이정표가 없는 지극히 난해한 주제들 중의 하나인 최후의 심판에 대해 신약과 세상의 실상을 근거로 마련된 이런 종류의 해법이 틀린 것으로 간주된다 하더라도 기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라이트가 확고히 붙드는 것은, 지금의 세상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선한 창조라는 것과 창조 전체가 마지막 심판을 즐거워할 것이라는 점이다(183). 지옥에 대한 라이트의 견해는 그와 코드가 비슷한 Love Wins의 저자 Rob Bell이 Surprised by Hope을 '캐캐묵은 옛 신학의 아성을 철거한 책'이라고 평가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는 주기도문 중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진다’는 말씀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는다(고전15:58)’는 말씀에 기초하여 모든 분야에서 사랑과 공의와 미와 전도에 힘쓰란다. 카이퍼의 일반은총 교리와 유사하다.

책의 말미에는 라이트의 성경 전체에 대한 입장이 소개된다(280-82). 그에게 성경은 창조와 새창조의 이야기며, 언약과 새언약의 이야기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왕국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과 이스라엘 역사의 완성과 악의 권세의 파멸과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 설립을 통하여 어떻게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on earth)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선 자리는 사도행전 끝과 계시록의 마지막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왕국 완성이 묘사된 계시록 21장과 22장의 마지막 장면을 향하여 읽어야 한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이는 그 두 장이 지금까지 이루어진 모든 것과 성경 전체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성경을 부분과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전체로 읽는 라이트의 신학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줄기는 바로 새하늘과 새땅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왕국이란 이야기다. 한편으로 우리는 성경을 많이 보지 않으면 성경에 해박한 사람들의 입장에 경이를 표하며 대체로 수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교부들을 알고 고전들을 알고 고대근동 언어들을 섭렵하고 현대의 과학까지 정통한 사람들을 보면 신학자나 목회자가 그런 것들을 다 공부하진 않았기에 그들의 신학과 교리에 ‘묻지마 추종’ 내지는 무비판적 존중의 태도를 취하기 쉽상이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과 일 인치만 달라도 ‘묻지마 비판’의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다. 자신의 교조적 신념의 주관적인 잣대를 몽둥이로 삼아 신학적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배우려는 겸손과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이란 찾아볼 수 없다. 둘 다 피해야 할 극단이다.

그 중에 하나를 취하는 게 자유지만, 그러면 반드시 과격한 무질서가 뒤따른다. 그래서 질서의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에겐 대화가 필요하다. 물론 서로의 자유가 존중되지 않으면 안되겠지. 물론 건설적인 대화라 할지라도 진리가 거기에서 산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잖아.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로 대화하는 수밖에. 대화하지 않는 것은 교제의 단절(excommunication)이다. 마지막 수단이다. 의견의 교환은 대화지만, 비판이나 정죄는 우리의 수단이 아니다. 나 자신도 양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두렵다. 하여 여기서는 특별한 찬사나 비판의 어조로 독후감을 쓰기보다 정리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렇게 의도했다 할지라도 일독 이후에도 라이트에 대한 기존의 생각이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을 보면, '단순한' 정리에도 나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과 개혁주의 신학이 무의식 중에 작용했을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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