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2일 월요일

핑계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자연과 초자연을 분리하여 은총의 영역에서 자연을 삭제하고 은총의 영역은 로마 카톨릭이 독점권을 행사하며 금전의 배를 불렸던 왜곡의 역사는 카톨릭과 개신교를 가리지 않고 지금도 어디선가 그 숨통을 유지하고 있다. 자연은 하나님의 계시와 통치가 펼쳐지는 신비로운 무대이고 때때로 자연과 대립하고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초자연은 초자연의 항존적인 좌소인 자연의 일상화된 신비로 안내하는 서곡일 수도 있다는, 믿음의 선배들이 이곳 저곳에서 남긴 사유의 조각들을 조립하여 결국 자연과 초자연의 구도를 폐기하고 모두 하나님이 만드시고 사용하신 초자연에 해당되며 항존성과 일시성 혹은 일반적인 것과 특별한 것 사이의 차이를 가졌을 뿐이라고 한 바빙크의 체계화는 위에 언급된 말씀에 기초한 것이었다.

우리는 초자연적 신비의 충만 속에서 살아간다. 바울의 언급에서 우리는 기독교 문화의 유무와 무관하게 이 땅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핑계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오병이어 경험한 사람들의 예수님 추종이 그 근저에 그런 기적을 이루신 주체가 누구냐는 물음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란 마태의 까칠한 지적은 굳이 초자연적 기적만 체험한 사람들을 겨냥한 것만이 아니다. 말씀의 총구는 이 땅에서 항구적인 자연의 형태로 제공되는 초자연의 암시를 먹고 마시고 호흡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조준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향해 그들의 무지를 정죄하는 법정의 판결문 읽어주는 재판관 자리를 넘보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고 가당치도 않다. 늘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식으로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욱 자라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의 내면을 더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며 섬겨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해함이 좋다.

이렇게 당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오늘은 그 물음의 이정표를 따라 걷는 하루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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