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5일 금요일

에베소서 1장 설교

에베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1장으로 말씀을 나누었다.

에베소 교회는 외관상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열매였다. 성도들은 당연히 바울을 믿음의 아버지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아 생사와 미래가 불투명한 감옥에 갇혀 차가운 옥살이에 들어갔다. 교회의 출발점과 초석으로 여겨졌던 바울의 투옥이 에베소 교회에 주었을 충격은 단순히 지도자를 상실한 위기감을 너머 정체성의 심한 혼란이 쓰나미 같이 덮쳤을 게 분명하다. 뿌리가 뽑혔고 초석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삶의 목적은 무엇이고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존재를 도저히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휘청거린 정체성의 혼란은 모든 빛이 꺼지고 일말의 기운조차 마비된 영혼의 어두운 밤이었을 게다.

바울은 그런 난관에 봉착한 에베소 교회에 위로와 회복의 붓을 들었다. 그의 붓길은 성경의 영감으로 이끌림을 받았고 인간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런 위중한 상황을 계기로 주님께서 교회에 원하시는 말씀을 전달하는 진리의 도구가 되었다. 바울은 흔들리는 성도들의 감정을 이용하여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지'란 자기도취 어법을 구사하지 않고 교회의 기초와 머리와 목적은 피조물의 흥망성쇠 사태와는 무관한 것임을 천명한다. 이런 방식으로...즉,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창세 전부터 시작된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에만 기초한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며 거룩하고 흠이 없어져 하나님의 속성으로 들어가는 복의 경지까지 초청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시간에 종속된 어떤 피조물이 원인으로 관여하지 않는 영원에 속한 사안이다. 당연히 비록 자신이 복음을 증거하고 희생의 눈물로 양육하고 말씀의 꼴을 먹여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였어도 자신은 에베소 성도들의 정체성을 좌우하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바울은 선언한다. 그리고 자신의 부재로 말미암은 그런 성도들의 불안과 혼돈을 은근히 부추겨 자신의 존재감 확보의 방편으로 이용하려 하지도 않았다.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가 주의하고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즉 내가 복음을 전해서 한 사람의 운명과 인생을 바꾸는 계기로 참여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근거로 어떠한 이윤이나 영광을 챙겨서는 안된다는 것 말이다. 한 사람의 구원, 그 시작은 창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오로지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으로만 소급된다. 구원의 끝은 하나님의 속성까지 이르는 것이며 베드로의 고백처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중간에 구원의 원인이나 목적으로 고개를 내미는 어떠한 흉물들도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와 하나님의 영광을 착복하는 것들이다. 진리의 전달은 비록 우리의 입술이 동원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철저히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이토록 놀라운 일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내 입술을 사용하신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영광과 감사의 분량만 생각해도 벅찬 일인데, 공로까지 챙긴다는 건 가당치도 않다.

이단이 나오고 교주가 등장하는 그 배후에는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영적 욕심과 교만의 창궐이 선행한다. 자신에게 유익만 제공하면 신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의 강한 종교성의 협조도 짝을 이루어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주동자의 과오가 언제나 더 중한 법이니까 비판의 촉수가 지도자의 문제를 겨냥하는 건 당연하다. 말씀 전하는 자가 말씀의 '종'이라는 신분에 합당한 처신이 요청된다.

자신의 구원에 어떤 자기만의 공로가 있다고 여기는 개개인의 공로의식 문제도 심각한 것이지만, 구원의 원인을 제공한 자처럼 여겨지는 말씀 증거자의 자기공로 챙기기가 교회의 등뼈를 휘게 하고 금이 가게 만드는 보다 치명적인 원흉이다. 생명과 삶 전체를 다 바쳐서 오로지 말씀만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나는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멘트만 시끄럽지 않게 남기고 조용히 사라지는 게 아름다운 유종의 미다. '내가 복음을 전했고 내가 개척했고 내가 일으켰고 내가 일구었고 내가 성공시킨 교회'라는 메가톤급 착각과 오만에서 모든 '1인칭' 주어를 철저히 삭제하고 무익한 종의 마땅한 도리에만 전념하는 여정이 우리에게 합당하다.

비록 현실을 갑갑하나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주님의 견고한 뜻과 이루실 신적인 고집 때문에 소망 중에 하루하루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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