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8일 일요일

교만이 속인다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에돔에 대한 오바댜의 묵시록에 언급된 구절이다. 에돔은 에서 가문을 대표한다. 에서와 야곱이 잉태 동기로서 리브가 자궁에 들어선 첫출입 때부터 그들의 관계성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했다. 그런데 에돔은 피로 맺어진 천륜도 깨뜨리고 섬겨야 할 대상인 야곱 가문을 오히려 멸절과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 살상과 약탈의 검을 무시로 휘둘렀다. 

그들의 하극상 행보는 생계의 절박이란 그나마 수긍의 고개라도 끄덕여 줄 명분에서 나온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들의 은밀한 속뜻을 가늠할 대목은 바로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 내릴까나' 구절이다. 그들의 막가파 칼부림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는 언명의 주어이신 하나님 조롱과 비웃음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오바댜의 입술에 임한 하나님의 준엄한 평가는 그들의 교만이 그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죄를 알기도 전에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 교회사 속에서 알레르기 반응의 항구적인 샘이었던 예정 이야기다. 그러나 이는 구약과 신약의 목젖을 떨면서 출고된 공통의 목소리다. 사람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하여금 백기투항 요청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심지어 하나님께 편애가 없다고 한 바울의 고백에도 모순의 짱똘을 던지는 메시지다. 한 마디로 납득이 안간다. 당연히 '내 머리로 납득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할배라 할지라도 편들지 않겠다'는 사람 나온다. 심하면 에돔의 경우처럼 천륜 뒤집기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저항의 의사표시 수단으로 가볍게 채택된다. 

여기서 난 겸손을 생각한다. 교만은 야만적인 에돔 족속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에돔과 동일한 성정의 소유자다. 이는 오바댜 후반부가 이스라엘 백성 이야기로 채워지는 이유다. 비록 내용이 멸망과 구원으로 대립을 이루고 있으나 서로 상통하는 스토리다. 겸손과 교만이 겨우 백지의 간격으로 서로 밀착되어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사야의 묵시록에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라는 말씀에 나오는 '정직' 개념도 색상만 다르고 질감은 겸손과 동일하다.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에게서 발견된다. 말씀 앞에서 정직을 붙드는 게, 이성의 피가 거꾸로 흐르고 상식의 배알이 뒤틀리는 일이라는 거 안다. 오히려 상식과 합리성을 동반하여 세상을 설득하고 급기야 하나님을 등지게 하는 방편으로 동원되는 겸손 껍데기가 사방에 즐비하여 그나마 살얼음판 분별조차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거 안다. 진정한 겸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가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먹고 마시는 자의 소산이다. 

단언한다.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만큼 겸손하다. 아무리 탄탄한 합리로 무장되어 있어도 말씀이 거절되면 교만에 속은 결과이다. 성경을 읽다가 여전히 낯설고 모순적인 대목을 만나면 두려움이 앞서는 이유다. 그래도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 지식은 있어서다. 말씀과 겸손은 불가분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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