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게으른 소득이 우리를 좀먹는다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한다"

현숙한 여인의 이상을 묘사하는 잠언의 한 대목이다. 양식을 먹는다는 목적보다 정당한 수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해석의 마침표를 찍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구절이다. 남편의 이런 칭찬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물론 목적과 수단의 전도를 만회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윤리적 교훈을 중요시 하면서도 그것을 최종적인 가치로는 삼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르기를 원하시는 가치는 도덕이나 윤리에 의해서는 생산될 수 없는 가치이다. 베드로의 언급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로까지 부름을 받아서다.

양식을 먹는다는 것은 곱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인간의 가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관심의 차순위가 당연하다. 그러나 게으름은 인간의 성향을 건드린다. 게을러도 소득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그 자체가 치명적인 잘못이나 오류인 것은 아니지만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는다'는 타락 직후의 인간생존 원리를 걷어차게 할 가능성은 높다. 게다가 게으른 소득에 적응된 사람이 주는 자의 고급한 부르심에 부응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말씀이 멸시되고 배푸는 자의 영광이 박탈되는 것보다 게으름 중에 굴러온 양식을 거절하는 것이 지혜롭다. 그런 양식으로 배부르면 처음에는 낯설어도 나중에는 끊을 수 없는 주초처럼 원리적인 차원에서 서서히 중독된다. 직접적인 경험은 없다만...

중독의 정도가 깊어지면, 이건 단순히 먹거리 문제를 벗어난다. 인간의 질과 무게를 건드리는 사안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에 대한 타인의 칭찬과 존경을 음식과는 다른 먹거리로 고대한다. 이를 위해 물질을 뿌리기도 하고 강요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보다 신사적인 유형으로 수단의 차별성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취득된 칭찬이나 존경은 게을리 얻은 무형적 먹거리의 대표적인 사례다. 바울은 칭찬의 출처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지적한다. 지혜자는 인자와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고 한다. 현숙한 여인은 여호와를 경외하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 여성이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게 사는 것인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원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른 방식으로 사는 모든 게으른 공짜는 달콤하고 짜릿하나 생의 가치가 그런 근성으로 중독되는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무서운 결과를 수반한다. 게으른 소득들이 여러 형태로 삶의 곳곳에서 기생하며 생의 가치를 좀먹고 있다. 날잡고 말끔하게 일소해야 하겠다. 반드시 부작용의 뻣뻣한 고개를 내밀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내밀면 때늦은 발견이다. 할수만 있다면 빨리 제거하는 게 상책이다. 집도 수시로 청소해야 되듯이, 우리의 근성이나 성향도 대청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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