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일 화요일

개념접속

개념의 부재가 우리를 속인다. 성경적인 개념들을 의식의 곳곳에 비치하지 않으면 자발적 동의를 따라 속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상대방의 속임수에 어떠한 하자도 발견되지 않고 비논리와 불합리가 보이지 않으면 옳다고 수긍한다. 밖에 창궐하는 거짓의 충동도 문제지만, 그런 충동에 자발적 수긍의 손을 뻗어 쉬 결탁하는 의식의 빈곤한 틀이 더 심각하다.

우리의 머리에 각인된 '산술적 모순' 개념이 명백하여,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계시지만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삼위일체 하나님 고백을 거절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산수의 유아적 경지를 지성의 최고 반열인 양 떠받드는 뇌구조의 소유자는 아무리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된 신이라고 말하는 허다한 증인의 목소리에 고막이 찢어져도 확고한 거절의 벽을 결단코 허물지 않는다.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그런 수의 기이한 본성'에 대한 터툴리안 식의 성찰이 의식의 본체에 접속되어 논리의 회로를 장악하지 않는다면, 의식의 총체적 거절을 불사하고 어거지로 믿어야 하는 맹신 차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거지로 '인정해 줄' 뿐이다. 우리는 믿어도 마음과 뜻과 생명과 힘을 다하여서 믿어야 하는데, 의식의 전적인 동의가 없으면 믿음의 기우뚱한 짝다리 자세는 교정되기 힘들다.

우리는 무수한 논리에 노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성경이 제시하는 사람의 유한한 이해를 넘어선 신령한 논리에 설복되는 건 설명하기 어려운 은혜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고 마음으로 더듬어도 발견되지 않는 분인데도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분에게 가까이 가는 자들에게 자신을 지극히 큰 상급으로 상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어떤 논리로도 거절할 수 없는 게 어찌 사람의 이성으로 해명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믿는 것과 아는 것의 절교는 허용할 수 없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건강한 신앙이다. 그래서 나는 바르게 믿기 위해서 알고자 힘쓰며 온전히 알고자 전심으로 믿는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계시의 분량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기 원하시는 그 만큼의 지식만 취한다. 계시는 은혜이고 그런 은혜 없이는 모든 것이 허사라는 말이다.

이는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라는 문맥과 결을 같이한다. 해괴한 궤변처럼 들리지만, 세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성경이 말하는 거룩하고 합리적인 논리이다. 이것에 설복되는 게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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