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2일 금요일

어거스틴 할배는 존재하는 것은 선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죄일 수도 있다. '모든 열방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이사야의 진술이 그저 낯설고 불쾌할 수도 있겠다.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런 언사도 우리의 내면에 삐딱한 저항을 일으키는 말씀이다.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으면 사회법은 침묵한다. 우리의 죄의식은 거기에 익숙해져 있다. 늘 몸담고 있으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어디까지 보실까? 죄악된 본성을 보신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다. 안보셔도 마찬가지. 사실 그곳을 보시지 않는다고 그것을 모르시는 것은 아니잖아. 물론 복음서에 예수님의 율법 재해석을 보면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 착상이 된 생각에 대해서 분명한 책임을 물으신다. 미움과 음란한 생각이 그런 것에 해당된다. 그러나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것이 인간의 마음'이란 사실묘사 이후에 '이를 누가 알리요마는'이라는 서글픈 현실인식 대목을 주목하면 '무의식' 영역에서 벌어지는 마음의 실상이 어떠한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떤 것인지를 대충 짐작하게 된다.

용서를 해 주어도 용서 의식이 발동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우리의 본성이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본다면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만 명시적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멸되지 않는다'는 예레미야 애가의 기록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자. 저질러진 범죄를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에서 발견되는 은혜와 긍휼도 있지만 우리의 의식에 걸러지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도 인자와 긍휼의 무궁함이 우리의 마땅한 진멸을 막아서고 있다는 것을.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나? 우리의 의식이나 동의와 무관하게 은혜의 무궁한 충만이 우리의 존재를 떠받칠 뿐만 아니라 홍수로 인류를 쓸어도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본성에 깊숙이 파고든 죄를 무궁한 인자와 긍휼로 인하여 빛보다 빠른 간격으로 용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가까운 가시적 문맥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인과를 지나치게 과장하여 그것에 우리의 감사를 맡기는 것은 도둑이나 강도의 수준과 다르지 않다. 날마다 죽어도 해소되지 않을 우리의 죄문제를 간과하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감사는 관념의 유희일 뿐이다.

아무리 고상한 척 해도 그냥 '멋지잖아' 정도의 자위적 감사에 경박한 금박을 입힌 표리부동 속임수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 우리는 감사할 수 있다. 우리의 죄성을 아는 지식만큼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를 아는 지식이 없이도 정직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취하는 우리의 모든 반응이 그런 원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나님의 거룩과 인간의 죄를 동시에 말하지 않는 소망이나 긍정 일변도의 책은 마약이며 지적 흥분제일 뿐이다. 기분을 돋구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지식의 부요함은 결코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지 않는다. 영원한 구원과 감사로 귀결되는 불가피한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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