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1일 일요일

루터주의 예정론

개혁주의 예정론을 정면으로 반박한 16-17세기 루터주의 학자들을 연구하면 선택과 유기에 대한 한발짝 더 깊은 통찰이 가능하다. 과학에 있어서도 기존에 발생한 실패의 문맥을 벗어난 새로운 발견은 그 가치의 수명이 잠깐 반짝이다 사라지는 유행성에 불과하다. 실패의 이유 파악이 더 중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한번의 충격적인 기적보다 무수히 반복되는 일상의 신비를 벗겨주는 게 보다 많은 분들에게 보편적 유익을 제공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고 알아도 일상과의 단절로 쉬 망각할 수밖에 없는 교리라면 장식품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박물관에 진열된 아이쇼핑 대상이 아니다. 경계선 너머의 고고한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일상과 뒤섞이는 어떠한 간격도 허용하지 말아야 할 양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하고 있다면 그런 분들의 논리와 입장이 어느 지점에서 갈등하고 묶여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 매듭을 풀어주는 것이 교리의 상용화 혹은 일상화를 위한 첩경이다. 실용주의 일변도로 가자는 건 아니다.

로마 카톨릭은 개혁주의 예정론에 관심도 약했고 당연히 비판의 날이 예리하지 않아 보다 깊은 사고의 긴박성을 조성하지 못한 반면 루터주의 예정론은 개신교의 울타리 안에서 그런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아래에 링크된 문헌들이 진리의 검을 더 예리하게 세우는 일에 유익하다. 반성도 하고 친절한 답변도 준비할 수 있는 자극제로 말이다. 눈길을 끄는 내용들도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성경의 각 구절들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이 교리적 문구 고수에 집착하여 다른 입장이 발각되면 곧장 전투적인 날부터 세우는 도그마 근성에 휘둘리는 이론적 개혁주의 신봉자도 꽤나 있는 것 같다. 예정론의 반석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다. 거기에 깊이 뿌리 내리지 않은 교리 추종자의 입술에는 생명력이 없다. 믿음의 선배들이 그런 정교한 고백에 이른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챙기면 경건의 모양만 갖추는 교리적 장신구에 불과하다.

폴라누스 예정론 읽다가 그와 대립각을 세운 루터주의 학자들의 저술들을 알게 되어 몇 개만 모아 두었다.

먼저, 하나님의 사전적인 의지(antecedens voluntas Dei)와 사후적 의지(consequens voluntas Dei)를 구분하고 후자에 근거하여 루터주의 예정론의 토대를 닦았고 토사누스, 베자, 잔키우스, 칼빈, 후터 등등을 집요하게 논박한 후니우스 문헌이다.

Aedigius Hunnius (1550-1603), Articulus de providentia Dei et aeterna praedestinatione seu electione (Frankfurt/Main: Johann Spiess, 1597)

특별히 다니엘 토사누스 입장과 대립각을 세운 후터의 단편이다.

Leonhard Hutter, De praedestinatione disputatio quarta (Wittenberg, 1594)

루터주의 예정론 중에서 가장 복잡한 스스로도 꼬인 듯한 입장을 개진한 퀸스테트 저작이다.

Johannes Quenstedt, Exegesis dicti Paulini, quod extat 2 Thess II v.13, agens de electione ad salutem (Wittenberg, 1679)

루터주의 예정론다운 일반성을 가장 잘 정리한 게할더스 전집 제2권이다.

Johannes Gerhardus, Loci communes theologici tomus secundus (Frankfurt & Hamburg,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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