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8일 화요일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50:15)

환난날에 주님부터 부르는 게 쉽지가 않다는 게 현실이다. 실제로도 대부분 주님부터 안부른다. 나를 불쾌한 환난에 빠뜨린 인접한 원인(causa proxima)들에 온 신경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환난 대처법은 먼저 분을 축적하고 거기서 추동력을 얻어 환난의 근인들을 낱낱이 추적하고 면면을 분석하고 만만한 순서대로 응징에 들어가고 쌓인 분이 말끔히 해소될 때까지 보복의 사슬을 이어가는 것이다. 원인들 중에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체물을 물색하고 아바타 분풀이로 대충 만족한다.

현실이 이런데도 환난날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면 얼마나 고결한 자기부인 행위인지 모르겠다. 환난의 사태를 둘러싼 모든 주변 환경들을 활호로 묶어내고 반응의 초점을 오직 주님께만 고정하는 행위가 바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목격했고 인과가 뚜렸하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환난의 혈맥을 짚어냈다 할지라도 거기에 매달리는 것은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겨우 우리의 눈과 두뇌로 걸러진 원인들의 멱살을 거머쥐며 너죽고 나죽자고 뒹굴어 봐야 돌아오는 것은 사단의 음흉한 미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환난의 전후 문맥에 아예 신경을 끊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가까운 원인들을 분명히 인지해야 하고 그에 준하는 처방도 뒤따라야 한다. 환난 유발의 감초와 같은 게으름은 성실로 교체하고, 건강을 해치는 불규칙한 과식이나 편식도 일정한 소식과 혼식으로 대체하고,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는 무례하고 자극적인 언사는 순화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음흉하고 거짓되고 잔인한 환경은 가능한 피하거나 거리를 두는 게 상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근접 원인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제끼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주권과 통치를 응시해야 한다는 거다.

사실 환난은 하나님을 아는 실질적인 지식이 움트고 자라나는 절호의 기회이다. 환난 속에서 우리의 무기력한 실상은 맨살로 감지되는 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지혜는 가장 선명하고 순수한 자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의 순도는 높아진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스스로는 불가능한 일인데 환난은 그런 무장해제 백기투항 자기부인 상황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당장은 불쾌하고 불편하고 불필요한 듯하여도 환난에서 정화가 일어나고 하나님도 경험하고 지식과 지혜도 자라간다.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를 환난에서 건지신다. 감사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환난의 이러한 생리 때문에 사도 야고보는 시험이나 환난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게 여기라고 했나 보다. 환난의 원흉이 나라면 회개하고 엎드리면 된다. 주님과의 관계와 거리는 밀착된다. 밖에서 침투한 환란의 경우에는 용서와 포용으로 주변 원인들을 정리하고 하나님을 부르면 된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주님은 우리를 환난에서 건지시고 우리의 입술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신다.

환난 속에서 만나는 우리 주님은 각별하다...오~~~ 주님!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