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4일 토요일

신학자의 고민

신학을 공부하며 늘 뇌리의 아랫목을 차지하는 고민이 있다.

1.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글을 쓰면서 관심과 가치의 구심점이 성경의 핵심에서 멀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어느 분야를 섭렵하고 나만의 고유한 지적 상아탑을 구축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을 흡입하며 고지의 나른한 쾌감에 잠기는 방향으로 관심이 휩쓸린다. 인간문맥 속에서 합의되고 설정된 임의적인 기준에 희비를 걸고 매달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코의 호흡으로 연명하며 훅 불면 날리우는 인생의 경박이 한없이 부끄럽다.

2. 신학에서 변증은 필연이다. 어떠한 이슈든 시시비비, 옳고그름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은 신학의 실천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변론의 각을 세운다고 해서 경건의 근육이 단련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엉뚱하고 기형적인 기질이 인격과 삶에 군살처럼 박힐 위험성만 더욱 높아진다. 그렇다고 침묵이나 무관심은 더더욱 능사가 아니겠다. 하여 어떤 특정인, 특정학파, 특정시대 신학이나 신앙의 문제에 개입하고 해명하는 것은 불가피한 과제이되 성경 전체의 진리가 고백되고 보존되고 전달될 수 있도록 늘 전역사의 세계교회 전체를 의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3. 괜찮은 믿음의 선배들은 진리를 왜곡하고 파괴하는 다양한 이단들의 광란을 도저히 침묵할 수 없어서 변증의 입술을 열고 논박의 붓날을 세웠지만 상대방이 내세우는 그릇된 논지의 허리를 꺾는 것 자체를 능사로 여기지를 아니했다. 묻고 답하는 중에 무의식적 타협과 수긍에 매몰되어 진리의 순수성과 엄밀성이 무너지는 변론의 생태적 한계를 간파하고 있었기에 완급과 원근을 적당하게 조절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잘못과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책망의 채찍도 필요하고 교훈의 당근도 필요하며 의로움의 구축과 올바름의 정립도 필요한 균형 말이다.

4.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문헌들을 읽고 다양한 사안들과 마주치고 다양한 필요들을 발견한다. 다 반응하며 살기는 곤란하다.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가 유한하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선택과 집중의 기준과 방편이 궁금하여 물음의 일급 리스트에 올려두고 줄기차게 고민한 끝에 성경이 모든 역사와 모든 만물의 헤아릴 수 없도록 무수한 것들에 대한 최상의 선택과 집중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성경은 세세한 것들을 일일이 다 건드리지 않으면서 온 세상과 전 역사를 다 커버한다. 놀랍고 신비롭다. 성경에 매달리면 몸이 열이라도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들이 백기로 투항한다.

5. 성경 텍스트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한 이오타만 씹어도 진리의 황홀한 맛에 곧장 중독된다. 내 영혼에 달기가 송이꿀의 당분을 무색하게 한다. 달콤하던 모든 것들의 달콤함을 제거한다. 모든 필요가 거기에서 해소된다. 여기에서 소박한 해법을 발견했다. 변증이나 논박은 특정한 사안에 몰입되어 두뇌와 입술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공격하고 입술을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택과 집중이 내 인격과 삶에 체화되고 축적되어 그 자체가 상대방의 인격과 삶에 발견적인 해법이 되는 식이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6.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진리가 인격과 삶으로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변론의 생리는 머리와 입술을 분주하게 하여 우리 자신이 먼저 진리의 터와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선행적인 과정을 무시하고 생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함정이다. 사단은 이런 논쟁에서 지더라도 우리가 변론의 덫에 걸리기만 하면 궁극적인 면에서는 이기는 승부수를 노리고 있다. 이는 사단이 깔아놓은 논쟁의 판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조심스런 이유겠다. 그래서 전인격적 무장이 우선이고 필요에 따라서만 언어와 붓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겠다.

7. 당장 반박의 피를 토하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가 초래될 것 같은 긴박한 상황들이 많이 발생한다. 이때 침묵은 비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진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등판이 위험하다. 웨민 고백서가 산출된 이후에 곧장 영국 본토에는 실종되고 그렇게도 우람한 진리의 체계가 뿌리마저 뽑히는 기현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가볍지 않고 단순한 것도 아니다. 지식의 생산과 진리의 파종이 항상 병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 말이다. 물론 진리가 어느 시대나 지역에 심겨지는 것은 기적이고 은혜이다. 진리를 머리만이 아니라 심장과 수족에 보관하는 건 은혜 수혜자의 도리겠다.

8. 보다 심오하고 높은 진리의 골격을 다시 생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역사 속에는 이미 주님께서 허락하신 교훈들로 충분하다. 그것을 전인격과 삶에 담아내는 것은 교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사 속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난 진리의 고백들을 입술에 올렸다고 신학자의 소임을 접는다면 큰 오산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한 시대의 심장을 관통하게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자신의 심장에 담아낸 진정한 진리의 사람들이 나타나야 가능하다. 사단은 이것을 경계한다. 생명보다 귀한 진리를 시끄러운 논쟁의 꺼리로 매도하는 일에 능란하다. 진리가 논쟁의 도마 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9. 교회는 진리의 터와 기둥이다. 진리는 교회의 신분이고 인격이고 삶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교회가 이 정체성을 포기하면 진리가 무너진다. 천재나 영웅 몇 사람의 활약으로 때우려는 창조적 소수 발상은 접으시라. 하나님의 사람들 개개인이 모두 동일한 비중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것은 일회성 운동이나 이벤트가 아니기에 선동이란 접근법도 접으시라. 우리의 방법론은 진리의 터와 기둥으로 각자가 선 자리에서 일평생 살아내는 삶이어야 한다. 우리가 진리의 터로 닦아져야 하고 기둥으로 세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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