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3일 목요일

여호와께 영광을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시115:1)

사태의 꼬인 매듭을 푸는 시인의 접근법이 특이하다. 급박한 필요를 전면에 내세우고 절박한 호소를 황급히 쏟아내는 격문이 아니라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는 겸양의 말로 시작하고 있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림이 합당한데 이는 그의 인자와 진실이 유일한 이유라고 시인은 설명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신속한 조치를 촉구하는 독촉장 발부의 떳떳한 자격이나 권한이나 공로가 우리에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종결된다. 터진 문제의 신속한 처리와 말끔한 수습을 위해 몸종을 호출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은 기도의 왜곡된 개념을 부추기는 충동으로 충만하다. 시인도 '너희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우상 숭배자의 비아냥과 조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환난의 늪에 빠져도 돕지 않으시고 핍박의 칼이 날아와도 막지 않으시는 너희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고 한다.

이쯤 되면 침묵의 반창고로 오만한 자의 입을 꼼꼼하게 봉쇄하고 겨와 같이 가벼운 존재를 대풍으로 일소하는 파격적인 행동파적 면모를 화끈하게 보여 주시라는 주문이 목젖까지 치밀어 올라 기소문 형식으로 출고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인생의 변덕에 섭리의 장단을 맞추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이름을 위하여' '나의 영광을 위하여' 스스로 행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선한 일들을 행하시고 형통의 때를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에 근거를 둔 은혜이며 감사와 영광은 하나님의 이름에 돌림이 너무나도 마땅하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한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같은 식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환난을 돕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 행보로 간주하고 비난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기회만 되면 하나님과 비기려는 고약한 버릇의 반사신경 수준의 돌출이 오히려 문제겠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다. 인생의 지극한 복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의 형통이며 모든 피조물의 신음은 이러한 영광의 회복과 완성을 고대하는 갈망의 표현이다.

삶 속에서 무시로 반갈아 등장하는 슬픔과 환난과 역경과 시련과 아픔으로 인한 우리의 신음도 하나님의 영광과 이어지지 않으면 안되겠다. 진로의 코 앞이 석자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더욱 결박되는 기도의 사람이고 싶다. 인생은 급히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 인생을 주목하면 할수록 허망함만 더해진다. 짧은 토막에 얽매이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다. 매 순간마다 그런 현명함이 발휘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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