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1일 화요일

우병훈 목사님의 페북 담벼락 펌글

칼빈의 인생에 중요한 논쟁 장면 중에 하나를 보여주는 이런 일화가 있다(스티켈베르거, 67-72).

 1536년, 로잔(Lausanne)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 종교회의가 열렸다. 서로간의 입장 차에 대한 격렬한 논쟁의 장이었다. 결과에 따라서는 한 도시가 개혁파 쪽으로 넘어올 수도 있고, 한 도시의 개혁 세력이 매장될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 양측의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님의 사람 칼빈은 처음 사흘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렐과 비레가 그들을 상대로 토론하도록 물러나 있었다. 나흘째 되던 날은 토론의 주제가 성만찬이었다. 가톨릭 측의 유능한 변론자인 미마르(Mimard)가 등단하여 자신이 준비한 연설문을 주의 깊게 읽어 나갔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교부들의 교훈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바로 그때, 마른 체구에 창백한 얼굴을 한 젊은이 한 사람이 일어서서, 비웃음을 머금은 채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그 유능한 가톨릭의 변론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칼빈이었다. 뜻밖의 인물의 출현에 의아해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거룩한 교부들에게 영예를 돌립니다. 우리들 중에 미마르 당신보다 교부를 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부들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교부들의 저작들을 좀 더 철저하게 읽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당신이 교부들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였더라면, 그들의 저작 중에 몇몇 구절들은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준비된 원고가 없는 상태에서 칼빈은 즉석에서 가톨릭 측에 의하여 제시된 여러 가지 의견들을 조목조목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그의 모든 논거들은 철저히 교부들로부터만 이끌어져 오고 있었다. 그들은 개혁파 사람들이 무시한다고 비난하던 교부들의 글을 통해서 자신들이 이토록 궁지에 몰리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칼빈은 먼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를 인용한 후 주석하기 시작하였으며, 교부 크리소스토무스의 것이라고 밝혀진 설교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출처를 밝혔다. “제11장 중간 부분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을 인용하기 시작하였다.

“제23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고는 마니교도인 아만투스(Amantus)를 반박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에서 또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상은 그의 글 중간 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 98편에 대한 주석에서,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전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으로부터 인용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복음 설교의 시작 부분인데, 아마 여덟 번째 아니면 아홉 번째 설교일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는 칼빈은 마치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듯이 청산유수처럼 수많은 작품들을 술술 언급하였다. 이미 상당히 긴 시간이 흘렀으나 27세의 젊은 칼빈은 고대 교부들의 저작들로부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 나가기 위해 증빙자료로 그것들을 인용하고 주석하는 일을 끝내지 않았다.

그가 능숙하게 인용하고 주석해 나가는 자료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거기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 즉 교부의 저작들을 스스로 신성시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낯선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토론되고 있는 문제에 관한 복음주의적인 해석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들 사이에서도 아직 충분히 언급되지 않은 많은 자료들을 엄청나게 쏟아 놓기 시작 하였다. “『집사 페트루스를 위한 신앙론(De Fide ad Petrum Diaconum)』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고, 『다르다누스에게(Ad Dardanus)』라고 제목 붙여진 서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는데...” 칼빈은 이 모든 것을 암기하여 대답하였다.

원고도 없이 책도 없이 그는 자신의 정리된 기억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학문적 천재성이 드러나는 순간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신앙에 의하여 확신되고, 성령에 의하여 감동되고 있는 거룩한 성경 진리였다. 천부적인 기억력을 통하여, 제시되고 있는 이 참된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학문적인 중언들을 들으면서 양측 모두는 숨을 죽였다. 자신의 고발과 비난을 확신 있는 목소리로 선포하였던 가톨릭의 연사는, 작은 체구에 창백한 젊은이 칼빈이 그의 두 눈을 자기에게 고정시킨 채 다음과 같이 승리에 넘치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을 때, 완전히 오그라들어버리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교부들에 대하여 적대적이라고 하는 당신의 주장이 무례하고 뻔뻔스러운 주장이 아닌지 스스로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교부들이 쓴 저작의 껍데기도 못 읽어 본 사람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일 당신과 당신보다 앞서서 연설했던 사람들이 단 한 번이라도 교부들의 저작을 통독하였더라면 아마도 현명하게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수 한 수 밀리다가 마지막에는 신학적으로 외통수에 몰리고 말았다는 패배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빛이 역력하였다. 더욱이 그것도 자신들이 자랑하는 교부들의 저작을 통해서 말이다. 물을 끼얹은 듯한 좌중 한 가운데로, 칼빈이 내리는 토론의 결론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려왔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은혜에 의하여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진리 안에서 참되게 우리들을 결합시켜주는 영적 교제, 우리들을 우리의 구세주와 연합시켜주는 영적인 연합... 이 영적인 교제는 영적인 줄 곧 성령의 줄을 통하여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칼빈은 자리에 앉아서 장시간의 연설로 말미암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완전한 침묵이 교회당을 가득 메웠다. 이 연설 가운데 일부분 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회중들조차도, 지금 27세의 이 젊은 칼빈에 의하여 무엇인가 진리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제들은 서로 경악에 가득 찬 질린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떤 사람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였고, 감히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들 가운데 유능한 변론자였던 미마르나 블랑셰로즈(Blancherose)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프란시스 교단의 한 탁발승이 일어났다. 대중들에게 인기를 모으던 유능한 가톨릭의 설교자로서 개혁을 반대하는 연설을 열렬히 하고 다녔다. 장 땅디(Jean Tandy)라는 사람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토록 웅변적인 설교로 온 교회당을 뒤흔들어놓았을 이 사람이 창백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미 그의 혀는 목구멍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바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는 것은 명백한 진리에 반항하는 완고함이라고 여겨집니다. 내가 지금 들은 바 연설에 따라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동안 나는 무지함 때문에 오류 속에서 살아왔고 잘못된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왔습니다. 내가 그동안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거슬러 말하고 행하였던 모든 것에 대해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도 내가 지금까지 가르쳐온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나는 지금부터 그리스도와 그의 순수한 가르침만을 따르기 위하여 성직의 옷을 벗어 버리겠습니다.”

 그날 거기 모인 양측의 토론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직감적으로 칼빈의 연설이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가톨릭 수도사들을 회심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토론이 끝난 다음날 아침, 로잔은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매춘 소굴들은 모두 폐쇄되었고, 모든 창녀들은 추방당했으며, 종교회담은 구체적인 결실을 맺기 시작하였다. 매일매일 보오(Vaux)지역의 성직자들은 개혁을 찬성하는 입장을 밝히게 되었고, 수개월 내에 수도 사역을 한 80여명의 사제들과 수도사 서약을 아직 하지 않은 120여명의 사제들이 개혁신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가장 완고하게 고수하던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심지어 미마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모든 일은 단지 칼빈의 철저한 학문적인 준비와 신학적인 천재성만을 입증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거룩한 경건 속에서 획득한 자기화 된 진리를 말한 것이다. 그는 교리를 말하였으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속에서 완성된 신앙의 고백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이 그러한 신학적인 선언 위에 함께 하신 사실이다.

 -- 이상의 내용은,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박종숙•이은재 공역, 나단출판사, 1992), 67-72쪽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좀 더 매끄럽게 읽히도록 제가 중간에 약간 수정하고, 단락도 나누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내용은 엄밀한 역사적 고증을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약간의 사료에 바탕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상당히 생생하게 그때의 사건을 묘사하고 있고, 또한 감동적이라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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