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1일 금요일

일정한 음식보다 말씀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욥 23:12)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건 행사였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삶을 의미한다.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고귀하게 여기는 것은 욥에게 일정한 삶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길래 물리적인 생존보다 말씀이 더 우선적인 것일 수 있었을까?

욥은 하나님의 뜻이 일정하며 아무도 돌이킬 수 없다고 인식했다. 하나님의 뜻이란 그가 고백한 것처럼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일정한 뜻이 욥에게는 말씀과 동일하다. 나아가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이 마음으로 행하고자 정하신 일정한 하나님의 뜻이 욥에게는 말씀인 거다. 단백하고 정확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작정과 말씀을 이렇게 하나로 묶는 통합적인 이해 속에서 욥은 자신의 불행과 세상을 해석한다. 바울은 욥의 이러한 말씀 이해를 그대로 로마서의 노른자위 안에 담았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 하나님과 세상을 아는 지식의 정도가 별반 다르지가 않다. 나도 이러한 사유의 방식을 선호하고 종종 활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욥기 결론에서 욥과 친구들이 모두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으며 욥 자신은 무지로 이치를 가리우고 스스로도 깨달을 수 없는 말을 뱉었다고 시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욥기 해석의 난해함이 여기에 있다. 욥과 친구들이 주고 받은 대화체 속에서 받은 교훈과 깨달음과 은혜가 결론부에 이르면 아주 난처한 상대화에 직면한다. 다양한 해명이 시도될 수 있겠지만 최소한 나는 욥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유는 이렇다. 물론 하나님의 책망과 욥의 반성이 욥기에 기록된 내용 전체에 대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부분적인 책망과 반성이라 한다면 부분의 경계선을 긋기가 애매하고 난감하다. 내용 전체에 대한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하며 논지를 전개한다. 즉 하나님의 완전성 및 충족성과 같은 신적인 속성들과 말씀에 대한 욥의 이해는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해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라는 정도에 있어서는 무지로 이치를 가리우고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합당하다. 

나아가 동일한 말과 내용도 둘러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된다. 하나님의 책망도 욥의 문맥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하여 욥의 상황에서 오고간 대화의 내용들은 그 문맥에 충실하여 이해하면 된다. 상황을 무시하고 욥의 어법이 책망을 받았다는 사실만 주목하여 로마서의 동일한 내용까지 까칠한 의혹의 갸우뚱 반응을 보인다면 진리는 위태로운 훼손에 노출되고 만다. 로마서는 내용을 그대로 받으면 되기에 어렵지가 않다. 그러나 욥기는 이해의 겹이 다양하여 각별히 의미의 중첩을 사려해야 한다.

일정한 음식보다 말씀을 더욱 귀하게 여겼다는 욥의 고백이 유난히 감미롭다. 마치 욥기가 음식보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욥기의 제맛을 모른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듯해서다. 욥기를 읽다 보면, 실제로 말씀에 대한 특급 우선순위 없이는 이해의 문턱에서 문전박대 당한다는 느낌이 반복된다. 물론 끼니가 다가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쥐도새도 모르게 순위가 역전되는 생리적 한계의 저항도 만만치가 않다. 음식보다 말씀이 고귀했던 욥의 일정한 삶이 지금은 너무나도 강한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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