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5일 일요일

사랑과 공의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마9:9)

'세리와 죄인,' '세리와 이방인,' '세리들과 창기들' 같은 표현들은 당시 '세리'라는 말의 문맥적 의미를 제공한다. 교회의 권면에도 회개치 않는 자들은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무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될 수 없는 부류의 전형이요, 자기를 사랑하는 자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이같이 하지 않느냐'는 산상의 교훈처럼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자기애의 대명사가 세리였다. 이처럼 예수님의 어법 속에서도 세리는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라고 하는 세리에게 다가가 '나를 좇으라'는 소명의 팔을 내미셨다. 게다가 하나님 나라의 초석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는 막중한 사도직을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 중의 죄인에게 맡기셨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마태의 지파적 출신을 규정하는 것은 자료가 빈약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유다지파 소속의 예수님 혈통에도 최소한 두 사람의 '레위'가 있었듯이 '레위'라는 이름은 레위지파 밖에서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마태를 유다지파 소속으로 규정하고 코드인사 아니냐는 혐의를 제기하는 것도 불가능한 '유치함'은 아니겠다.

아마도 '레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부르심을 받은 레위지파 소속처럼 하나님께 쓰여지면 좋겠다는 부모의 기대감 속에서 작명된 이름일 것이다. '레위'라는 이름 대신에 '마태'라는 생소한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도 당시 세리직의 야비하고 부끄러운 생리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칼빈은 추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을 세리가 부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보다 현란한 유흥의 접대(a divitibus lautius accipi) 를 기대하며 부자들만 건드리는 분으로 간주했던 참으로 기발한 발상의 소유자도 칼빈의 시대에는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칼빈은 마태의 부르심을 계파나 부와 무관한 예수님의 값없는 선하심의 범례(specimen gratuitas suae bonitatis)이며 모든 부르심이 우리 자신의 의로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순전한 너그러움 (mera sua liberalitate) 때문이란 사실의 증명이며 전형(testimonium et typus)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어떠한 신분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은혜 앞에서의 평등에 대해서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 옳고 정당하다. 그러나 누가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며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과 더불어 '모든 것을 버렸다(καταλιπὼν πάντα)'는 사실을 굳이 언급한다.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마태의 반응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마태가 자신을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totum dedisse) 복음의 모든 장애물을 버렸다고 설명한다. 죄인에게 구원과 최상의 부르심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죄인의 자리에서 그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죄의 자리에 머물러도 된다는 승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에서의 떠남을 의미한다. 세상이 괜찮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정하신 죄의 자리에 제도의 합법적인 돗자리를 깔고 머물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와 평등을 운운하는 것은 주님을 욕보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능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공의에 상응하는 우리의 변화도 수반한다. 사랑을 명분으로 공의를 짓밟거나 공의를 명분으로 사랑을 져버리는 것은 동일하게 위험한 편협이다. 타인에 대해서는 공의를 휘두르고 자신에 대해서는 사랑을 적용하는 것은 비겁하고 야비하다. 십자가의 제자도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타인과 자신 모두에게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공의가 입맞추는 제자됨을 요구한다. 모든 사람들을 한없이 사랑하되 죄와의 단절은 철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