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1일 금요일

무지의 출처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욥42:3)

인간의 눈에는 혼돈과 무질서가 자연의 본질이다. 규칙과 질서는 인위적인 타협이다. 우리의 뇌를 언어적 기억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그런 인위적 타협의 충만이라 하겠다. 있는 그대로의 혼란하고 무질서한 자연에 반듯한 규칙과 질서를 강요하는 현상이 문명이란 이름으로 둔갑한다. 기묘한 것은 자연의 그런 폭력적인 인간화 속에서 인간은 안식을 누린다는 거다. 인간화된 문명의 문턱을 넘어서면 늘 불편하고 불안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보다 인간화된 자연에 보다 월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런 불안심리 제거의 일환인지 모르겠다.

욥은 자신의 지각으로 번역할 수 없는 자연의 구석진 그러나 본질적인 현상들의 이치를 물으시는 하나님의 물음에 답변의 입술을 열지 못하였다.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찌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는 자신의 고백을 현실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지각이 한발짝도 출입할 수 없고 어떠한 과학적 번역도 불허하는 신비들로 온통 채색되어 있다. 조금만 정직해도 탐구의 메쓰를 들이댈 수 없는 자연의 경이로운 신비에 압도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실상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땅의 일들도 깨닫지 못하는데 그토록 무딘 판단의 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섭리를 겨냥하는 것은 얼마나 무례하고 무모한 일일까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기에 말을 적게 하여야 한다는 전도자의 지혜는 하나님과 쟁변하고 하나님을 판단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오만과 교만의 싹을 발아 초기부터 제거하는 데에 심히 유용하다. 인간의 최고급 지성들이 과학과 학문에 일생을 내던지고 매달리는 맹목의 배후에 하나님과 선악의 판단권 장악에 대한 본성적 헤게모니 경쟁심이 감지되는 것은 왜일까.

욥의 출중한 지성으로 걸러진 자연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참된 이치를 가리우는 무지일 수 있다는 욥 자신의 정직한 자세가 향기롭다. 스스로 헤아려서 알 수 없는 자연의 신비를 말씀으로 조성하고 동일한 권능의 말씀으로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자연의 신비가 커질수록 커져간다. 이에 더하여 솔로몬이 입었던 역사상 전무후무 수준의 화려한 영광의 옷도 언제 소멸의 아궁이에 던져질지 모르는 들풀이 입은 가냘픈 영광보다 못하다는 예수님의 파격적인 평가도 의문의 꼬리를 덮석 문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러하다.

이치를 가리우는 무지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언어가 욥보다 더 분주하게 내 입술에서 출고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오늘은 욥기 일독으로 나 자신을 무지의 출처로서 정직하게 응시하고 하나님을 한없이 경외하는 하루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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